‘선시’란 말을 처음 알린, 그윽한 동양 시편의 집대성!
쉼 없는 세상에서, 조용한 시정과 고전의 언어로 가을을 맞는다
“선시(禪詩)란 무엇인가? 선이면서 선이 없는 것이 시요, 시이면서 시가 없는 것이 선이다. 그러므로 선시란 언어를 거부하는 ‘선’과 언어를 전제로 하는 ‘시’의 가장 이상적 만남이다.”
『선시』가 무려 38년 만에 전면 개정신판으로 독자를 찾는다. 1975년에 ‘현암신서’의 한 권으로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힌 『禪詩』는 ‘선시’라는 말 혹은 장르를 처음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알린 기념비적인 책이다. 한국, 중국, 인도의 고승과 시인들이 남긴 ‘선문(禪門)’의 진수를 집대성한 이 책은 불교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도 시적 감동을 주어 오래도록 읽혔다.
시인으로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얽매이지 않은 수행자의 길을 걸어온 석지현 선생이 20년 가까이 절판되어 그립던 『선시』를 오늘의 독자를 위해 아주 새로이 다듬고 보탰다. 한글 세대를 위해 풀이와 해설을 알기 쉽고 보기 쉽게 다듬고, 중국과 한국의 한시를 새로 추려 넣었으며, 특히 일본의 하이쿠를 소개했다. 선승들의 깨달음의 희열과 조용한 생활의 서정을 노래한 대표적인 선시는 물론, 당시(唐詩)와 향가를 비롯한 선적이고 명상적 분위기가 풍기는 동양의 명시 384편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잠시 스마트폰을 잠그고 선시 속에서 자신의 언어와 계절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보자.
‘선시’란 무엇인가? 깨달음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고 전할까!
『선시』 책표지에는 한 승려가 웅크려 앉아 있다. 무얼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승려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고개를 수그리고 낮잠을 자고 있다. 낡고 해진 옷을 걸친 꾀죄죄한 몰골. 조선 말기의 화가 유숙이 그린 《오수삼매(午睡三昧)》다. 머나 먼 길을 탁발하는 승려가 잠시 쉬는 모습에서 어떤 이들은 사뭇 감도는 선미(禪味)를 느낄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풍상에 속으로 감춘 사념이 스미고 배어 흘러나오는 듯한 어떤 감흥... 그게 바로 선시의 느낌 아닐까?
선(禪)이란 무엇인가? 시는 무엇인가? 중국인들은 시에 대해 대체로 네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유가처럼 시를 도덕 교육과 사회 비평의 도구로 보는 관점, 둘째는 시의 정서적인 면에 중점을 두는 개성주의적 관점, 셋째는 송대(宋代) 시인들처럼 주로 시의 기교적인 면에 중점을 두는 관점, 넷째로 당대(唐代) 시인들처럼 주로 시의 영감적인 면을 강조하는 직관적 관점이다. 이중 넷째 ‘직관파’ 시인들은 “시란 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되며, 진정한 시란 존재와 세계에 대한 통찰을 심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선시의 맥이 여기에 닿는다.
불교 명상법에 기원을 둔 선은 사고와 감정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는 수행법이다. 이를 통해 존재의 본질(깨달음)에 다가서고자 한다. 선은 언어를 부정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 속에서 직관적인 깨달음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선을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선, 그 깨달음을 알리자면 어떤 식으로든 표현해야만 한다! 선사들은 관념의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깨달음의 섬세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시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첫 번째 선시가 출현한다. 이어 시인들 사이에서 ‘시의 분위기를 심화시키기 위해 선에 접근’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두 번째 선시의 출현이다.
첫 번째 선시는 대통 신수(大通神秀) · 영가 현각(永嘉玄覺)을 위시한 중국, 한국 선승들의 작품이 많은데, 깨달음의 희열을 읊은 시와 산생활의 서정을 노래한 시가 그 주류를 이룬다. 두 번째 선시는 주로 왕유 · 이백 · 두보 등을 위시한 당송(唐宋) 시인들의 작품인데, 선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시와 산사의 풍경을 읊은 시가 주류를 이룬다. 선승들과 시인들 사이에서 선시가 퍼지자, 결국에는 선과 시는 둘이 아니라는 선시론이 등장하게 된다.
『선시』에는 당연히 중국의 선시가 앞선다. 중국 선문을 이은 조주(趙州), 선월 관휴(禪月貫休), 설두 중현(雪竇重顯), 천동 정각(天童正覺), 야보 도천(冶父道川) 등이 쓴 선시의 진면목이 화려하다. 당대의 시성들, 즉 한산, 전기, 백거이, 유종원 등이 쓴 주옥같은 선시도 수두룩하다.
한국 선시도 넉넉하고 눈부시다. 한국적인 선을 정착시킨 지눌의 제자 진각 혜심(眞覺慧諶)의 선시부터,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린 월명사 · 충담의 향가(鄕歌)들, 혜초의 순례시가 이어지고, 고려말 함허 득통(涵虛得通, 1376~1433)의 불후의 선시, 조선 시대의 매월당 김시습의 비애감 어린 선시, 청허 휴정(淸虛休靜, 西山大師)에서 조선 말기의 경허 성우(鏡虛惺牛)까지 이어지는 한국 선시의 광맥들이 소개된다. 이때에 오면 선시는 ‘인간의 시’로 탈바꿈하는데, 만해 한용운의 선시는 따사롭다.
일본 선시 또한 수준 높고 파격적이다. ‘술과 여자(酒色)’는 선문에서 금기시되어 왔다. 당연히 술과 여자에 대한 선시는 드물다. 그러나 애액을 노래하는 일본 선승 잇큐 소준((一休宗純)에 의해 금기가 깨져버리고 만다. 하이쿠의 거장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어찔한 시, 시와 삶이 하나였던 사람 다이구 료칸(大愚良寬)의 걸림이 없는 이상적인 선시도 소개한다.
선시 - 불교와 도교의 세계, 동양적 사유와 삶의 느낌이 가득한 시정의 성찬!
이 책에는 384편의 선시를 18개 장의 시상(詩想)으로 나누어 담았다. 각 장 제목과 시제(詩題)만 보아도 어떤 시정을 노래하는지 가늠이 될 것이다. 속도와 소란의 시대에 잊힌 아날로그의 심상이 여기에 있다. 독자 여러분의 그때그때의 마음이 끌리는 대로 찾아 펼쳐 감상해보면 좋겠다. 어떤 장은 하이쿠만을 담았고(12장), 어떤 장은 ‘십우도’를 모티브로 한 선시를 소개하고(15장), 어떤 장은 향가를 모아 소개하고(16장), 몹시 야릇한 에로틱한 선시시를 모은 특색 있는 장도(17장) 있다. 18개 시상의 갈래는 다음과 같다.
1. 靜 정적 · 산집 고요한 밤
2. 悲 비애 · 저 누가 옥피리를 부는가
3. 無 무상 · 표표히 날아가는 외기러기
4. 餘 여백 · 산비 그윽한 곳
5. 愚 바보 · 멍청이의 노래
6. 默 침묵 · 번뇌의 바다에서 노 젓는 사공
7. 山 산정 · 안개여울 아득히 길을 놓친 채
8. 淸 청빈 · 눈보라 창을 치는 소리
9. 月 달빛 · 계수나무 천년의 혼이
10. 春 봄날 · 꿈속에서
11. 脫 탈속 · 대숲에 홀로 앉아
12. 一 한 줄 선시 · 꿈은 마른 들녘 헤매네
13. 轉 전환 · 두 눈썹 치켜들고
14. 秘 격외 · 그림자 없는 나무
15. 歸 귀향 · 소 찾는 노래
16. 讚 향가 · 바람결 노래
17. 愛 에로틱 선시 · 눈먼 미인 가마 타고
18. 覺 깨우침 · 깨달음의 노래
전면 개정신판을 내면서 새로 바꾼 부분이 많다. 우선 선시 장 분류는 시상이 서로 닮은 시들끼리 묶었던 기존 방법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번 신판에서 새로 엮거나 뺀 시상이 많다. 가령 몽(夢), 심(深), 공(空) 등이 빠진 대신 무(無), 여(餘), 탈(脫) 등의 심상이 새로 추가되었다. 따라서 초판에서 빠진 선시도 있고, 새로 들어간 선시도 많다. 특히 일본 선시를 많이 추가했다. 그리고 한글 세대를 위해 한문 원시의 ‘시 형식[詩體] 구분’과 ‘운율평측법(韻律平仄法) 표기’를 삭제하고, 한자에 일일이 한글 음을 달아 보기 쉽도록 했다. 낱말풀이도 알기 쉽고 간단하게 고치고, 원시의 지나친 의역과 잘못된 번역은 모두 새로 고쳤다. 마지막으로 지은이의 해설은 명쾌하고 멋들어져 선시의 그윽한 풍미를 십분 전한다.
고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시 복원한 것도 있다. 초판 이후 재판에서 빠졌던 경봉대선사가 읊은 게송(偈頌)과도 같은 서문과 미당 서정주 선생이 붙인 서문(「교열을 마치고」)을 다시 찾아 실었다. 40년 가까운 세월 전에 붙인 두 대가의 제사가 훈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