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번 겨울에 쓴 이 희곡이 상연되려면 프랑스에서 자유 보장을 위한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상연을 연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희곡은 공연을 위해 씌어졌고, 무대연극의 관점에 맞춰 완전히 각색된 작품입니다. 예술적 관점에서 얼마든지 상연될 수 있겠지만, 검열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자유가 돌아오는 날 제 희곡을 세상에 내놓겠습니다.”
- 빅토르 위고, 1866년
국내 최초로 완역되는 빅토르 위고의 희곡
빅토르-마리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는 평생 동안 수많은 시와 소설, 희곡을 쓴 대문호(大文豪)이기도 했지만 저명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을 지지하며 국회의원으로 정치계에 입문하지만, 1851년 12월 2일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를 통해 제정을 선언하자 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가 된다. 반정부 인사로 낙인찍힌 뒤에는 제2제정시대(1852-1870) 이십 년을 벨기에와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기의 그에게 문학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을 구현하는 피안과 같았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사상의 자유와 박애주의가 실현되는 세상을 그리는 주제가 많다. 독자들에겐 특히 소설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위고는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1831)나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1862)과 같은 대표작을 통해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공간을 그렸다.
희곡으로는, 『크롬웰(Cromwell)』(1827), 『에르나니(Hernani)』(1830), 『왕은 즐긴다(Le Rois’Amuse)』(1832), 『뤼크레스 보르지아(Lucrece Borgia)』(1833) 등 널리 알려진 작품과 그의 사후에 출간된 『자유연극집(Le Theatre en Liberte)』(1886)이 있다. 위고는 희곡에서 셰익스피어식의 낭만적이며 자유롭고 전복적인 극작을 주창하며 프랑스 고전주의가 지켜 왔던 여러 가지, 즉 정형시에 가까운 알렉산드리아식 12음절 운율법, 한정된 주제, 삼일치 원칙(행위, 시간, 장소의 일치)과 같은 제약을 모두 파괴하는 실험을 하게 된다. 연극의 주인공들이 한정된 주제와 언어표현에서 벗어나 소설에서와 같은 자유를 누리자는 것으로, 이렇게 획득된 서사적인 대사는 줄거리를 진척시켰을 뿐만 아니라 연극을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이데올로기 발현의 장(場)으로 확장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는 검열이 극심했기에 특히 위고의 문학적 이상과 정치적 신념이 녹아 있는 『왕은 즐긴다』의 경우 독재자인 왕과 귀족 계급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주제로 다뤄 루이 필립 왕이 초연 다음 날 바로 상연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천 프랑의 보상」이 속한 『자유연극집』(1886)에는 「젖은 숲(La Foret Mouillee)」 「할머니(La Grand-mere)」 「천 프랑의 보상(Mille Francs de Recompense)」 「간섭(L’Intervention)」 「먹을 것인가?(Mangeront-ils?)」 「검(L’Epee)」 「갈뤼스의 두 만남(Les Deux Trouvailles de Gallus)」 「토르케마다 (Torquemada)」 등 총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다. 국내 최초로 완역되는 빅토르 위고의 희곡 작품 「천 프랑의 보상」은 위고가 영국령 채널 제도의 건지 섬(Guernsey Island)에 망명해 있을 무렵 『레 미제라블』을 완성한 후 사 년 뒤인 1866년에 집필한 것으로, 그의 소설의 주요 테마인 사회적 숙명을 다시 한 번 다루고 있다. 작품이 완성되자 오랜 공백을 깨고 나온 위고의 극작품에 파리의 극단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검열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에서 공연하겠다는 위고의 뜻에 따라 무대에 올려지지 못했다.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후, 파리의 대극장들이 그의 대표작들을 무대에 다시 올리기 시작한 시기에도 그는 여전히 이 작품의 상연만큼은 거부했다. 1886년 『자유연극집』이 나올 때에도 이 작품만 빠져 있다가 1934년에야 포함되었고, 1961년 메츠 시립극장에서 위베르 지누(Hubert Gignoux)의 연출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돈’이라는 소재를 통해 재현된 150년 전 파리
그의 대표작인 『레 미제라블』의 후속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희곡이지만 소설인 『레 미제라블』과 겹치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는 경찰청장으로 묘사된 들라보 경감과 같이 몇몇 실존했던 인물에 대한 언급도 동일하거니와, 정치사회적 배경이나 주제의 측면에서도 유사점을 지닌다. 쿠데타를 통해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자 공화파 지식인들은 이에 저항하였고, 1867년에 이르러서야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법이 제정된다. 그러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항복하자 의회는 바로 공화국을 선포한다. 정치적 탄압,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횡포가 극심하던 1860년대에 씌어진 이 작품을 통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처럼 사회의 부정과 인간 불평등을 고발하고 서민들의 연대를 주장한다.
1820년대 파리의 어느 겨울, 도둑 글라피외는 경찰을 피해 쫓기다가 젊은 여인 시프리엔의 집에 몸을 숨기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드 푸엔카랄 남작의 금융투자 대리인 루슬린이 그녀의 할아버지 제두아르가 진 사천 프랑(오늘날 약 8,800유로로 약 1,200만원에 해당)의 빚을 미끼로 시프리엔을 아내로 들이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때마침 시프리엔의 연인인 에드가르가 은행에 입금하려던 회사 돈으로 대납하며 위기를 모면하지만, 그 돈을 메우기 위해 도박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에드가르는 자살 시도를 한다. 길을 지나던 글라피외는 에드가르를 구해내게 되고 그를 구한 보상금을 시프리엔의 가족을 돕기 위해 쓴다. 결국 글라피외의 노력으로 시프리엔은 친부인 드 푸엔카랄 남작과 만나게 되고 에드가르와는 맺어진다.
『레 미제라블』의 선량한 장발장과 반항적 부랑아인 가브로슈를 섞어 놓은 듯한 주인공 글라피외는 모든 사건의 주체이자 관찰자로서, 극 중 긴 독백을 통해 사회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냉소적이면서도 진지하게 읊조린다. 마치 고대 그리스 연극의 합창대나 예언자와 같이 구석에 숨어 다른 인물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며 이를 설명하고 같이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더 나아가 각 상황 속에서 교훈적인 내용을 끌어내고, 잠재적 구원자처럼 숨어 있는 암호를 해독하기도 한다. 이상주의자인 제두아르 대대장이 위고의 신념을 대변한다면, 국회의원으로 등장하는 바뤼탱은 부의 증대가 목적이 되어 버린 19세기의 자본주의를 대변한다. 드 퐁트렘과 로몽 자작으로 대표되는 귀족층의 젊은이들은 세속의 신분 덕분에 안락한 삶을 누리지만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대 자본가인 드 푸엔카랄 남작은 부를 지녔지만 덕을 존중하고 신의를 지키며, 정의가 실현되기를 믿는, 글라피외와 더불어 독특하고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혼합된 사회참여극
빅토르 위고는 그의 비극적인 다른 작품과 달리, 여기에서는 진지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사회 참여극 모델을 보여 준다. 즉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불의와 금권만능주의에 저항하도록 동시대 시민들을 끌어들이는 데 우화와 해학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위고는 죽음, 고통, 인간의 조건 그 자체에 관해 철학적으로 큰 웃음을 유발한다. 그의 웃음은 무대를 위해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연극은 일회적이고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장르이기 때문에 웃음도 폭발하듯 순간적으로 터진다. 극 중 글라피외는 밑창과 굽이 다 닳아 납작해진 자신의 신발을 춤출 때 신는 무도화에 빗대거나, 어머니에게 루슬린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는 시프리엔을 손벽 치며 응원하는 등, 진지한 상황에서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한다. 멜로드라마적 구조도 극 중 해학적 요소에 한몫을 하는데, 출생의 비밀, 미혼모, 자신보다 젊은 여인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악역의 등장 등의 과장된 상황은 당시 관객들에게도 웃음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또한 중간중간 삽입되는 사회적 불평등과 결정론에 대한 글라피외의 독백은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전체적으로 동시대의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야기 속에 달콤함과 씁쓸함,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기묘하게 섞여 있는 산문체 희곡이라 할 수 있다.
로랑 펠리의 연출로 재해석된 고전
「천 프랑의 보상」은 2010년 프랑스에서 툴루즈 국립극장 예술감독 로랑 펠리(Laurent Pelly)의 연출로 무대에 올려져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이 씌어진 지 백오십여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사실상 연극이란 마땅히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함을 표명하는 것”이라고 한 연출가의 기획의도처럼, 작품이 전하는 중요 메시지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하고 정치적 미학적 처리를 함으로써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백지 위에 선을 그리듯 공간을 윤곽선으로 처리해, 선이 주는 생동감, 건조함, 단순함 등을 강조한 무대디자인은, 굶주린 위장처럼 텅 빈 집을 가진 가난한 민중의 비참함을 은유한다. 또한 절제되고 세련된 무대장식들은 눈과 함께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많은 부분에서 관객들의 상상력을 동원하게 만드는 참신함을 선보인다. 극 중 인물들은 독백을 하다가 무용가처럼 공간을 유영하기도 하는데 펠리는 춤에 가까운 형식, 즉 무용적인 방식으로 공간을 그려낸다. 배우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양식화 하도록 만들고 관객들의 시선의 각도를 변화시키며 공간을 분할하면서 행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펠리는 고전이 가지고 있는 현대적인 요소를 최대한 극화해 연출하였고, 문학과 사회, 역사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이 책은 툴루즈 국립극단이 성남문화재단 초청으로 갖는 2014년 10월 25일(토)-26일(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있을 내한공연에 맞춰 출간된 것으로, 상연용 대본은 원작에서 일부 생략·각색된 부분이 있으나 이 번역본은 원작 그대로 옮겼다. 2010년 프랑스 툴루즈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졌을 당시의 공연사진〔폴로 가라(Polo Garat) 촬영〕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