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에서 골라 모은 고전 침뜸을 찾아서
침뜸처방은 그 특성상 설명이 간결하다. 이번에 (사)허임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동의보감 침뜸'은 동의보감에서 골라 모은 고전 침뜸을 두꺼운 처방서 가운데서 찾아내어 간결하게 엮은 책이다. '동의보감 침뜸'은 허임의 침구경험방과 함께 조선침뜸의 쌍두마차 격이다. 이 두 책은 대략 30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허준과 허임에 의해, 30여 년 정도의 간행 시차를 두고 세상에 나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동의보감. 그 가운데 침뜸부분을 우리는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수많은 역대 의서들을 인용하여 정리한 동의보감은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 등 25권으로 되어있다. 동의보감에서 침뜸 관련 부분은 제일 마지막 25권에 침구편을 엮어놓고, 내경편ㆍ외형편ㆍ잡병편의 각 병증별 치료법에서 주로 그 끝 부분에 침구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동의보감』의 침뜸 부분 전체와 허임의 『침구경험방』모두를 그대로 옮겨 묶어놓은 『침구집성』에 대해 청나라시대 나온 가장 유명한 침구전문서로 평가하고, 청나라 명의 랴오륜홍이 편찬한 것으로 하여 1874년 인쇄되어 나오기 시작한 이래 지금도 중국에서는 잇달아 출판되고 있다. 중국어로 된 인터넷 서점에서 전시되어 있는 책을 보면 1956년 인민위생출판사에서 영인되어 나온 책도 눈에 띄고, 1986년 북경시중국서점에서 출판한 책과 1994년도 출판본도 보인다. 중국중의약출판사에서는 1998년 2006년 2010년에도 표지를 바꿔가며 계속 펴내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 조선 침뜸의 대표적인 성과물 중 하나인 동의보감 속의 침뜸에 대해서 따로 모아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미 침구경험방을 번역해 펴낸 바 있는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가 이제 동의보감에서 골라 모은 고전 침뜸을 찾아서 ‘동의보감 침뜸’이라는 한권의 책으로 엮어냄으로써 한국에서도 마침내 조선 침뜸의 대표적 저작물 두 종 모두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대략 30년의 시차를 두고 나온 '동의보감 침뜸'과 허임의 침구경험방은 당시까지의 침구의서를 폭넓게 수용하고, 조선의 독자적인 침구임상경험을 추가한 조선침뜸 최대의 성과물이다. 두 책은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호보완적이다. 동의보감의 편제는 허준의 독특한 방식을 적용했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역대의 침구서적을 인용하여 정리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자신이 추가한 견해는 거의 찾기 어렵다. 반면 허임은 고전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면서 함께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자주 표명하고 있다. 두 책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차이점이 뚜렷하다. 허임 침구경험방의 침뜸처방은 내경ㆍ외형ㆍ잡병편이라는 형식으로 수록하지 않고, 부위별과 병증별로 구분하고 있다. 다만 병증문의 목록구성 즉, 질병분류에 있어서는 동의보감의 병증이름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이 많다. 동의보감의 구성은 어떤 병증에 약물과 침구를 겸용하여 종합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동의보감의 전체 내용은 역대 의서 중에서 실제적인 내용을 뽑고, 이를 첨삭 변용하며 치밀하게 자신의 체계 속에 재구성한 학문적 성과물이다. 이에 비해 침구경험방은 침구를 전문으로 하여 병기 및 침구이론을 요약정리하면서도 병증별 침구기법과 혈의 선택을 주축으로 하는 임상경험을 담은 방서(方書)이다. 두 책이 절묘한 짝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동의보감의 침뜸과 침구경험방 모두 모은 근세 중국의 유명 의서『침구집성』
조선은 침구술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나라였다. 이미 조선 침뜸의 우수성은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었다.
청나라 건륭연간(1736년∼1796년)에 간행된 『침구집성』(鍼灸集成)이라는 책이 있는데, 1874년과 1879년에도 다시 간행되었으며, 청나라 시대 나온 가장 유행했던 침구전문서이다. 랴오륜홍[廖潤鴻]이란 명의가 저술한 것으로 표기하여 간행된 이 『침구집성』이 허임의 『침구경험방』전체 내용과 허준 『동의보감』의 침구 관련 부분 전체, 중국 명나라 장개빈이 편찬한 『유경도익』(類經圖翼)의 일부를 그대로 모아 엮어 출판한 책이다. 『침구집성』 권1은 『동의보감』과 』침구경험방』에 나오는 침법, 구법(灸法), 금침혈, 금구혈, 와혈(訛穴), 십사경순행과 병후(病候), 침구길일 등의 내용을 『동의보감』→『침구경험방』→『동의보감』 순으로 번갈아가며 옮겨놓은 것이다. 』침구집성』 권2는 병증에 대한 침구치료법을 논하고 있는데, 『침구경험방』→『동의보감』 순으로 옮겼다. 권3과 권4는 경맥과 경혈에 대한 내용인데, 십사경의 유주(流注)와 유혈(兪穴)의 부위, 주치작용에 대해서는 『유경도익』 권6과 『동의보감』을 번갈아 옮겨다 놓았고, 140여 개의 경외기혈의 명칭 부위 주치에 대해서는 『유경도익』 권10과 『침구경험방』, 『동의보감』의 별혈 부분을 그대로 옮겨 수록한 것이다.
『침구집성』에서는 이렇게 『침구경험방』,의 모든 내용과 『동의보감』 의 침구관련 내용 전체를 그대로 옮겨 쓰면서 『침구경험방』,과 『동의보감』에서 옮겼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고난의 시대에 수 십 년에 걸쳐 수많은 의방서의 내용을 모두 파악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뽑아 의학의 체계를 새로이 구성한 조선의 대의학자 허준의 이름은 간 곳이 없다. 전란의 와중에서 백성들에게 침뜸봉사를 하며 얻은 평생의 임상을 침구경험방에 간추려 전한 허임의 이름도 없다. 그 자리에 청나라 명의의 이름이 있고, 이로 인해 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청나라 이전의 50여 종 의학문헌을?인용수집, 집대성한 책이라고 알고 있다.
중국에서는 현재도 이 『면학당 침구집성』이 청나라의 랴오륜홍을 저자로 하여, 판을 거듭하며 출판되고, 곳곳의 서점과 인터넷서점을 통해 팔려 나가고 있다. 근세 중국에서 나온 가장 유명한 침구전문서가 출판업자의 그릇된 상술이 동기가 되어 만들어진 위서(僞書)라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침구집성』이 조선 침구학의 성과를 모은 책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에 따라 『침구경험방』과 『동의보감』 침구관련 부분을 한데 묶어 놓은 』침구집성』을 통해 조선의 양대 침구문헌의 가치가 중국에서 저절로 인정된 셈이다.
침뜸의 간결성 살리고 …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떠한가? 동의보감 스물다섯 권 중에서 맨 마지막 25권으로 침구편을 붙여두고, 내경ㆍ외경ㆍ잡병편의 각 병증문 뒷부분에 침뜸치료법이 적은 분량으로 들어있어서 『동의보감』침뜸의 가치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침구편을 제외한 『동의보감』각 편 전체의 분량에서 침구치료법이 차지하는 분량이 적고, 약물처방을 먼저 열거하고 침구법은 뒤편에 두고 있는 서술순서 등으로 볼 때, 침구치료에 대한 허준의 견해는 약물치료를 보조하는 이차적인 치료법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침구라는 치료수단이 약물치료의 보조수단이 아니라 아무리 위급한 경우나 난치질환에도 침구치료를 통해 대응하여야만 했던 침의(鍼醫) 허임의 상황과 허준을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동의보감 침구법이 부실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침뜸은 그 특성상 약물처방에 비해 간결하다. 따라서 두꺼운 종합처방서 가운데서 침뜸부분을 뽑아내어 따로 편집하여 널리 전하는 일 또한 동의보감을 편찬하고 침구경험방을 간행하여 널리 백성들이 활용하도록 한 선조들의 뜻을 살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허준이 실제로 침뜸시술을 하지 않았고, 동의보감 침뜸이 의학고전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그 처방이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의학고전은 이미 오랜 임상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의보감의 침뜸은 허준의 의학전반에 관한 높은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이론체계를 수립하고, 고전 침구임상의 결과를 그 체계에 차근차근 수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알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동의보감 서문에서 “경전의 말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거나 옛날 방법에만 매달릴 뿐 변통(變通)해서 쓸 줄을 모르면 안 된다.”라고 한 말을 다시 새겨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