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장대하고 존엄한 역사서(歷史書)
'그렇다. 모든 땅에는 과거의 기억이 손금과 지문처럼 남아 있다. 우리 모두에게 각자 다른 지문(指紋)이 있듯이 모든 땅도 고유한 무늬(地紋)를 가지고 있다. 더러는 자연의 세월이 만든 무늬이며, 더러는 그 위에 우리의 삶이 연속적으로 새긴 무늬이다. 이는 우리가 땅에 쓴 우리 삶의 기록이며 이야기이다. 따라서 땅은 장대하고 존엄한 역사서이며, 그래서 귀하고도 귀하다. 이를 지문(地文, landscript)이라고 하자.' 1992년부터 '빈자의 미학'을 화두로 삼아 비움의 건축, 덜어냄의 건축을 선보여 오던 건축가 승효상(承孝相, 1952- ). 그가 평소 대중을 상대로 설파해 오던 생각들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냈다. '지문(地文)'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단어를 표제로 삼은 이 책은, 지금껏 자신의 건축이념으로 삼아 왔고 또 같은 이름의 책으로 발간했던 『빈자의 미학』(1996)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신의 건축론 혹은 방법론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문화와 그 현상을 '인문(人文)'이라 하고, 우주와 천체의 온갖 형상과 그 법칙성을 '천문(天文)'이라 하는 것처럼, 땅의 형상과 무늬, 켜켜이 쌓인 역사와 더불어 땅에 새겨진 온갖 기록들, 그리고 그 땅만의 고유한 특성을 '지문(地文)'이라 할 수 있다. 건축가 승효상의 건축적 방법론의 키워드라 할 지문(地文)이라는 말은 '대지의 온갖 모양'이라는 뜻으로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지문(landscript)은 좀더 포괄적인 의미를 띤다. 일의적으로는 땅의 형상이나 무늬를 가리키지만, 그 낱낱의 형상과 무늬는 역사의 기록인 것이다. 더불어 인간의 수많은 흔적들이 남겨 놓은 하나의 이야기이며, 자연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의 건축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저자는 기껏해야 자신이 지향해야 할 건축의 출발점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건축의 출발점, 시작이 어디인가에 따라 그 결과는 천양지차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저자가 이 책에서 건축의 역사, 인간이 욕망해 왔던 건축사를 언급해 가며 이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건축의 이념과 지표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에 관해 성찰한 내용들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건축이란, 새로운 시어(詩語)를 겸손히 지어 덧대는 일
'이 지문은 끊임없이 변하는 생명체이며 스스로 무엇을 덧대어 달라고 요구하는 기운체이다. 혼도 있고 정신도 있으며 심지어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수잔 랭어(Susanne K. Langer)의 말처럼 '장소의 특성을 시각화하는 우리의 건축행위'는, 그 장구한 역사를 체험해 온 땅이 새롭게 요구하는 말을 경청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온갖 예의를 갖추어 그 경이로운 언어를 들추어내고 깊이 사유하여, 새로운 시어를 그 위에 겸손히 지어 덧대는 일이 건축이다.' 이 책은 크게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지문」에는 서구건축의 역사적 사건이나 현상, 시대적 흐름 등을 사례별로 짚어 가면서, 인류가 건축을 통해 무엇을 욕망해 왔으며 그것이 어떻게 잘못 표출되어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으로 남는지를 잔잔하게 이야기 들려주듯 서술하고 있으며, 그러한 건축의 역사 속에서 저자가 도달한 '지문'이라는 개념의 설명과 그 중요성을 역설하며 마무리한다.
고대의 바벨탑이나 지구라트, 현대의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 등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높이에 대한 인간의 건축적 욕망, 나와 남, 적(敵)과 아(我), 중심과 주변, 상류층과 하류층을 철저하게 구분짓기 위해 적용되었던 이상도시 건설의 노력들, 투시도법으로 대변되는 단 하나의 중심적 세계관으로 나타난 건축물들,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일련의 건축물들은 땅 위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땅의 역사를, 땅의 특성을, 땅의 원리를 철저히 무시한 채 세워진 것들이다. 이에 반하는, 땅과 친화하는, 나와 남, 중심과 주변의 구분 없이 모두 한데 어우러지는, 그리하여 단 하나의 중심이 아닌 여러 개별 중심이 존재하는 건축의 사례들도 들고 있다. 서울의 옛 금호동 달동네, 모로코의 마라케시,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의 백색 주거지 등이 그러하다. 건축이라는 것을 '온갖 예의를 갖추어 그 경이로운 언어를 들추어내고 깊이 사유하여, 새로운 시어를 그 위에 겸손히 지어 덧대는 일'이라고 표현한 저자의 눈에, 이곳의 사람들은 땅의 섭리대로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건축은 결국 무너지며, 남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기억뿐
'건축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세운 자의 영광을 만세에 기리기 위해 기념비적 건축이 세워졌어도, 혹은 가진 자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온갖 기술적 성취를 이루며 하늘 높이 솟았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 건축도 결국은 중력의 법칙을 이겨낼 수 없다. 남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기억뿐이다. 그것만이 구체적 진실이 된다.' 제2부 「다 이루지 못한 작업의 기록」에는 1부에서 서술한 건축론 또는 방법론으로 시도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한 프로젝트들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지문(地文)'이라는 키워드를 내건 작업들인데, 어떤 것은 설계공모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장하기 위해 제출한 경우도 있다. 저자에 따르면 제1부에 실린 ''지문'의 보기로서 참조할 만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묶어서 소개한 것이다. 이 하나하나의 프로젝트들은, 저자의 건축이념 또는 방법론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어떻게 현실화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예들이다. 이 책은 표지에서부터 판권까지 모두 국문과 영문이 함께 표기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로서 발돋움하고 있는 저자의 행보와 궤를 같이하기 위해서이다. 더불어 1, 2부에 걸쳐 실려 있는 100여 컷의 도판과 설명글은 저자의 사유를 좇아가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