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세계에서 돌아와 남편과 어머니를 바라보는 죽은 아내이자 딸의 이야기다. 유령 화자의 시선을 좇아가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슬프고 애틋하다. 임종 직전과 사후 직후의 시간에 함께 했던 추억이 간간이 수를 놓는다. 주된 공간은 화자가 죽은 방, 그곳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남편과 어머니에게 어떡해든 말을 걸고 위로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어쩜 조용히도 앉아 있군요!
당신의 뺨에 속눈썹의 그늘이라도 스칠까, 입가의 잿빛 주름이 떨리는 입 꼬리에서 긴장으로 멈출까, 창백한 옆얼굴이 약간은 붉어질까, 왼쪽 눈썹이 곡선을 그리는 지점에서 이마의 잔 근육을 씰룩거릴까, 빤한 내 눈길 아래서 조금은 불안해져서 앉아있을까, 깍지 낀 손에서 손가락 하나를 까딱할까, 바람이 만들어내는 성 나고 좌절한 외침에 뒤를 돌아보거나 반은 망설임 반은 기대로, 반은 사랑 반은 증오로 얼굴을 들고 반쯤 열린 창문과 당신 사이에 서 있는 나를 응시할까. 오 저런! 당신이 한숨을 쉬고 몸을 뒤척인 것 같아요. 당신은 고개를 들었어요. 그러나 이마의 잔 근육은 그대로 있군요. 입가는 팽팽해지고 굳어졌는걸요. 주름이 더 깊어진 당신의 뺨, 내 눈에는, 달빛이 벽면에 드리운 거대한 도리아식 기둥보다도 더 핏기가 없어요. 나는 그 벽에 기대었어요. 팔을 뻗었어요.
당신은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어요.
혹시 당신이 몸서리를 칠까, 탁자에 놓인 팔을 갑자기 번쩍 들어 올릴까, 내 이름을 부를까, 겁에 질려 숨을 몰아쉬거나 사랑 때문에 크게 울먹이거나 아니면 벌떡 일어서거나 소리를 지르지는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