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서커스」 바람난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자 한스. 희망도 의욕도 없지만 그래도 살아내야만 하는 비루한 삶. 그에게 서커스단에서 황당한 제안을 해온다. 가짜 호랑이 역할을 해달라는. 그런데 배반의 고통과 질투와 복수욕이 일으킨 폭력과 야만성. 그는 진짜 야수가 되어 있다.
「박차」 고전 영화의 걸작을 꼽을 때 자주 거론되는 토드 브라우닝(Tod Browning)의 호러「프릭스Freaks」(1932) 원작 단편. 자크 크루베의 외사랑은 상상을 망상으로 망상을 집착으로 만든다. 이런 남자가 뜻밖에 횡재를 한다면……. 이 남자 자크는 그 돈으로 사랑을 산다. 여자 잔느는 그 사랑을 기만과 배신으로 받는다. 이로써 기괴한 파국이 시작된다.
「전갈자리」 육감적인 매력이 넘치는 여자. 별점과 예언을 지나치게 믿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매력이 반감되지는 않는다. 그녀에겐 성실하고 능력 있는 남편과 행복한 가정이 있다. 결혼한 그녀를 잊지 못하고 끈질기게 수작을 걸어오는 옛 남친도 있다. 이게 문제다. 그녀는 정신 못 차리는 옛 남친에게 단호하다. 결혼서약을 깰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 자신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남편 곁에 있겠다고……. 과연 그럴까?
「유령 커플」 오컬트 요소를 가미한 유머러스한 유령 단편. 결혼식을 막 끝내고 허니문을 떠난 신혼부부. 새 신부인 나는 세상 행복하다. 그 여자가 잠든 남편의 곁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황당함, 공포, 분노, 질투 온갖 감정이 존재의 밑바닥까지 헤집어 놓고 상처를 낸다. 그것도 신혼부부의 침실을 침범하는 이 뻔뻔한 여자는 산 사람이 아니라 혼령이다. 유령과 벌이는 사랑의 쟁탈전. 나도 본격 맞대응에 나선다. 맞바람 전술. 이 맞불과 어부지리 작전은 의외로 성공적이다. 그런데 이놈의 사랑 때문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렇게 골머리를 앓아야할까?
「비」 날씨와 심리가 효과적으로 어우러진 작품.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의 무력감 속에서 일주일째 내리 쏟아지는 폭우로 집안에 갇힌 부부. 무감각과 예민함이 충돌하면서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주는 간결하지만 서늘한 필치가 인상적이다. 버넷의 또 다른 단편 「안개」가 몽환적인 환상성에 중점을 두었다면, 「비」는 심리적 균열과 공포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린다.
「허니문」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신혼 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나이가 차서, 배우자 집안이 잘 살아서, 다들 하니까 그냥저냥 결혼한 커플. 정작 배우자에 대해선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이걸 신혼 여행에서 깨닫는다면……. 함께 하는 삶의 시작일 허니문, 따로 사는 삶의 시작이 될 수도. 이 단편, 그냥저냥 흘러가는 듯하다가 마지막 한장은 메스처럼 시리고 섬뜩하다.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특히 영국의 시골 풍경 및 그 특징을 묘사한 일군의 작품과 초자연적인 공포를 가미한 단편들로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극빈한 가정 형편 때문에 아홉 살 때 학업을 그만두고 화이트채플에서 심부름하는 사동으로 생계에 뛰어들었다. 특히 이 시기의 화이트채플은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나중에는 브리튼과 옥스퍼드에서 사무원으로 일했지만 문학과 그림, 음악에 대한 열망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시골의 한 오두막에서 지내며 창작에 몰두했고, 그 결과 43세에 첫 작품집 『아담과 이브 그리고 비몽사몽 Adam and Eve and Pinch Me』을 출간했다. 이후 작품을 속속 발표하면서 단편 「행상인The Higgler」을 포함하는 단편집 『생선장수의 바이올린Fishmonger’s Fiddle』 등으로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의 단편집은 당대 미국 출판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전통의 북클럽 《북 오브 더 먼스 클럽Book of the Month Club》에서 “이달의 책”에 선정하면서 미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공포 요소를 포착하는 발군의 능력은 《뉴욕타임스》의 호평을 받은 또 다른 단편집 『무서운 기쁨Fearful Pleasures』에 잘 드러난다. 소설 외에 『시선집The Collected Poems of A. E. Coppard』을 비롯한 수권의 시집과 사후에는 자서전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