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거래하고,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들
처음 제약·바이오 사업개발 업무를 접했을 때, 저는 딜의 성패가 협상력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더 높은 선급금을 받아냈는지, 누가 로열티를 몇 퍼센트 더 확보했는지, 누가 더 유리한 해지 조항을 계약서에 넣었는지가 좋은 딜과 나쁜 딜을 가르는 기준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 업계에서도 딜의 성과는 대개 숫자로 설명됩니다. “총 계약 규모가 얼마다”, “선급금이 얼마다”, “두 자릿수 로열티를 확보했다” 등의 표현이 계약의 성공을 상징하는 언어로 사용됩니다. 저 역시 한동안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숫자가 크면 좋은 딜이고, 협상에서 더 많은 조건을 얻어내면 성공한 딜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딜을 직접 경험하고, 계약 체결 이후의 실행 과정까지 지켜보면서 조금씩 다른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발표 당시에는 모두가 성공이라고 평가했던 계약이 몇 년 지나지 않아 흔들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조건이 평범해 보였던 계약이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적으로 작동하며 예상보다 훨씬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반드시 특정 계약 문구 하나에 있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로열티율이 낮아서도, 마일스톤이 부족해서도, 해지 조항이 불리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 조건들이 어떤 권리와 의무에 연결되어 있었는지, 실패했을 때 통제권이 누구에게 이동하는지, 계약 이후 상대방이 실제로 개발을 지속할 유인이 존재하는지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구조에 있었습니다.
그 경험 이후 저는 딜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높은 선급금이 반드시 좋은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높은 선급금이 미래 권리와 선택권을 일찍 넘겨주는 대가일 수 있었습니다. 높은 로열티 역시 무조건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개발과 상업화에 대한 통제력이 없고, 상대방에게 충분한 개발의무가 부과되어 있지 않다면 높은 로열티는 실현 가능성이 낮은 미래의 숫자에 불과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보수적으로 보이는 구조가 장기적으로 훨씬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부 지역이나 적응증을 유지하고, 개발단계에 따라 권리를 나누며, 상대방의 성과가 부진할 때 개입하거나 권리를 회수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계약은 최초 발표금액이 크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구조가 되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별 조건의 크기가 아니라, 각 조건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였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단순히 사업개발 절차나 계약 조항을 설명하는 실무서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마주하는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왜 어떤 회사는 좋은 기술을 가지고도 파트너의 관심을 얻지 못하는가.
· 왜 동일한 데이터가 어떤 파트너에게는 기회로, 다른 파트너에게는 위험으로 해석되는가.
· 왜 협상 단계에서는 완벽해 보였던 딜이 실행 단계에서 무너지는가.
· 왜 법적으로 정교한 계약이 실제 운영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 왜 어떤 기업은 여러 차례의 거래를 거치면서도 계속해서 불리한 구조에 갇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면 소싱, 자료 작성, 실사, 가치평가, 협상, 계약과 제휴관리를 서로 분리해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딜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하나의 연결된 구조로 이해해야 합니다. 첫 미팅에서 형성된 인상이 실사의 방향을 결정하고, 실사 과정에서 형성된 위험 인식이 가치평가에 반영되며, 가치평가의 가정이 계약금과 마일스톤 구조로 옮겨지고, 계약서의 권리와 의무는 다시 계약 이후의 개발·상업화 행태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여덟 개의 부로 나누어 살펴봅니다.
제1부 「딜을 바라보는 구조적 관점」에서는 제약·바이오 사업개발가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에서 출발합니다. 파트너십의 기본 구조와 딜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산의 목표 제품 특성과 시장 포지셔닝, 특허와 자유실시 분석, 개발단계별 파트너링 전략과 기본적인 거래 형태를 살펴봅니다. 좋은 기술을 보유하는 것과 거래 가능한 자산을 만드는 것이 왜 다른지, 사업개발이 연구개발이 끝난 뒤 시작되는 활동이 아니라 자산 설계 단계부터 개입해야 하는 기능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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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부 「계약 이후의 구조 작동」에서는 계약 체결 후 비로소 시작되는 실행의 문제를 다룹니다. 계약 직후 90일 동안 무엇을 정리해야 하는지, 제휴관리 조직과 의사결정체계는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안전성 데이터 교환계약과 공급계약은 왜 핵심 라이선스 계약만큼 중요한지를 살펴봅니다. 계약상 확보한 권리가 실제 예산, 개발일정, 공급, 규제 대응과 상업화 과정에서 작동하도록 관리하는 방법과 상대방의 전략 변화로부터 자산가치를 보호하는 재무적·법적 방어선도 함께 다룹니다.
마지막으로 제8부 「전체 구조를 읽고 설계하는 능력」에서는 앞에서 다룬 내용을 복합적인 파트너링 상황에 적용합니다. 과학, 특허, 가치평가, 권리범위, 계약조건과 조직 간 이해관계가 동시에 충돌하는 사례를 통해 어느 한 조항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를 통합적으로 판단하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정해진 답을 외우기보다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핵심 위험을 발견하고, 가능한 선택지를 비교하며, 무너지지 않는 구조를 설계하는 사고력을 훈련하는 것이 이 부분의 목적입니다.
이 책의 제목을 『제약바이오 사업개발 실전 바이블』로 정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바이블’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붙이는 것은 개인적으로 큰 부담이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제약·바이오 산업에서 어느 한 권의 책이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업개발은 회사의 규모, 자산의 개발단계, 협상 상대방과 시장환경에 따라 언제나 다른 답을 요구합니다. 저의 경험 또한 이 산업의 모든 상황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바이블’이라는 제목을 선택한 것은 이 책이 단 한 번 읽고 덮어두는 안내서가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업개발 업무를 시작한 주니어에게는 전체 딜 프로세스를 이해하고 실무의 기본을 익히는 책이 되었으면 합니다. 몇 년의 경험을 쌓은 중간 관리자에게는 자신이 반복해 온 업무의 구조적 의미를 다시 발견하고, 팀과 여러 기능을 연결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하는 책이 되었으면 합니다. 임원이나 경영진에게는 개별 조항이나 숫자를 넘어 기업이 어떤 위험을 보유하고 어떤 선택권을 남겨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같은 문장을 읽더라도 독자의 위치와 경험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의미가 보일 수 있습니다. 주니어 시절에는 협상기술로 읽었던 내용이 관리자의 위치에서는 내부 조율의 문제로 보일 수 있고, 경영진이 된 뒤에는 기업의 생존과 자본배분에 관한 문제로 다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독자들의 역할과 책임이 바뀔 때마다 다시 펼쳐볼 수 있는 책,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특정 상황에서 바로 찾아볼 수 있는 실무적 기준을 제공하면서도, 경험이 쌓일수록 다른 질문과 새로운 통찰을 끌어낼 수 있는 지식의 보고가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바이블’이라는 제목에 담았습니다.
이 책이 완전한 또는 상당한 정답을 제공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실제 사업개발 현장에는 정답이 없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판단의 결과가 수년 뒤에야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하나의 답이 아니라, 상황이 바뀌어도 다시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사고의 기준입니다.
이 책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례와 조항, 숫자와 협상 상황에는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 사례에 적합한 해답을 외우는 일이 아니라, 서로 흩어져 있는 과학·시장·재무·법률·조직의 문제를 하나의 구조 안에서 연결해 보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개별적인 문제처럼 보이던 요소들이 어느 순간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의 설계도로 보이기 시작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사업개발가에게 가장 중요한 사고방식을 익혀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이 책을 펼쳐 들 독자들을 생각하며 저 역시 온 힘을 다해 원고를 써 내려갔지만, 그럼에도 완벽하지 못한 부분이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족함이 있을지 모릅니다. 완벽한 정답 대신 치열한 사유의 기준을 전하고자 쓴 책인 만큼, 읽으시면서 아쉬운 점이나 수정이 필요한 부분을 발견하신다면 독자 여러분의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출간 이후 확인되는 수정 사항이나 보완 내용은 자유아카데미 홈페이지 자료실(www.freeaca.com)을 통해 안내할 예정이오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이제 개별 조건 너머의 전체 구조를 읽고, 서로 다른 요소를 연결해 더 나은 딜을 설계하는 통합적, 구조적 사고 훈련을 저와 함께 힘차게 시작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