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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원

    남승원 프로필

  • 학력 경희대학교 박사
  • 경력 '포지션' 편집위원
    문학 계간지 '시인동네' 편집위원
  • 데뷔 2010년 서울신문

2015.08.26.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박은식(朴殷植, 1859. 9. 30∼1925. 11. 1)은 조선조 말기의 유학자이자 일제 강점기 언론인·교육자로서 제2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지냈던 독립운동가다. 호는 처음에 겸곡(謙谷)이었다가 나중 백암(白巖)으로 했다.
조금 늦은 나이에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 성리학과 과거 준비를 하던 그는 일찍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17세 무렵 과거 공부에 회의를 느낀 그는 아버지의 서당을 떠나 당대에 이름난 안태훈(安泰勳, 안중근의 부친)을 비롯해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 그리고 구한말 영국 언론인이었던 베델[E. T. Bethell. 한국명 배설(裵設)] 등과 교분을 나누고, 정약용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을 찾아가서 학문을 배우며 당시 급변하는 사회 현실과 직접 만나게 된다.
1898년 독립 협회에 가입하고 이어 개최한 만민 공동회에서 간부로 활동했고, 1898년 9월 창간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로 언론인으로서 활발한 사회참여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05년 11월 20일, 이 신문에 실린 장지연(張志淵)의 유명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문제 되어 사장이었던 장지연이 구속되고 신문은 정간되는 상황에서 박은식은 주필로서 폐간 때까지 사실상 ≪황성신문≫을 주관한다. 이 시기 그는 ≪대한매일신보≫에도 여러 차례 객원으로 논설을 발표한다.
1906년 설립된 민중 계몽 단체인 대한 자강회에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대한자강회월보≫에도 역시 많은 계몽 논설을 썼으며, 10월에는 서우 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서우≫(1906년 12월 창간)의 주필을 맡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저술 활동에도 힘쓰며 여러 권의 책과 번역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1907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원로회원으로 참가하는데,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해서 1909년 창립된 서북 학회(西北學會)를 실질적으로 지도하면서 기관지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활약했다. 이때 발표한 <유교구신론(儒敎救新論)>은 실천적 모습으로의 유교 개혁을 주장하면서 당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박은식은 서북 학회의 산하 교육 기관으로 서북협성학교를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교장을 맡기도 한다.
1912년 상해로 이동해 여러 우국지사들을 만나면서 동제사(同濟社)를 창설했다. 동제사는 겉으로는 상해에 있던 한인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었지만, 독립을 목표로 해외 여러 곳에 지사를 두는 등 많을 때는 30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박은식은 총재를 맡아 여러 활동을 하면서 1913년 상해에 교육 기관인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는 등 두드러지는 활동을 한다.
1914년에는 상해에서 교류하던 중국인들의 권유로 홍콩으로 건너가 중국 혁명당 관계자들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발행한 잡지 ≪향강(香江)≫의 주필을 맡다가, 이 잡지가 당국에 의해 정간 조치되면서 다시 상해로 돌아온다. 상해로 돌아온 뒤에는 ≪안중근전≫과, 망명 중 틈틈이 집필해 오던 국권 상실의 과정이 기록된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서술한 ≪한국통사(韓國痛史)≫(3편 114장)를 중국의 출판사에서 발행한다.
1915년, 이상설(李相卨),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신한 혁명당을 결성한다. 1918년 러시아 우스리스크 지역의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 초청으로 현지로 이동해 기관지 ≪청구신보(靑丘新報)≫(이후 ≪한족공보≫로 변경) 주필을 맡는다. 1919년 1월, 해외 망명 지사들이 추진한 ‘대한 독립 선언서’에 39인 중 한 명으로 서명을 했으며, 3·1 운동의 영향으로 17일 이 지역의 독립운동 대표 기관인 국민의회가 주관한 독립 선언식에서 선언서를 작성한다. 26일에는 미국의 서재필과 홍범도 장군을 포함한 대한 노인 동맹단을 조직하면서 발족 취지서를 작성했다.
1919년 8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다시 상해로 온 박은식은 갓 출범한 임시 정부에서 사료 편찬 위원회의 책임을 맡았다. 이듬해 독립 투쟁사를 기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했다. 1921년에는 초대 사장이었던 이광수와 편집국장 주요한이 변절하면서 떠나간 임시 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로 선임된다. 이후 임시 정부 조직 개편을 위한 국민 대표회의의 결렬로 인해 임시 정부가 약화되면서 기관지 발행도 어렵게 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1924년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독립신문≫ 간행을 책임지게 된다. 12월에는 국무총리에 취임하면서 미국으로 떠나 버린 이승만 대통령의 대리를 겸직하고 있었는데, 1925년 3월 21일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발의되면서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으로 선임되었다. 임시 정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대통령직을 수락한 박은식은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실시하는 내각 책임제 개헌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총재였던 이상룡(李相龍)을 추천, 선출한 뒤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사임 이후 병세가 악화되면서 11월 1일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에게 유촉(遺囑)을 남긴 뒤 상해의 병원에서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임시 정부 최초의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상해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에는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박은식 수필선집> 저자 소개

남승원 작품 총 5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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