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logue]
사람들은 어릴 때 꿈과 소망을 가진다. 이는 생애에 가장 활기차고 아름다운 삶의 샘터이다. 이런 꿈은 부모와 스승으로부터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서 기인할 수 있다. 나는 부산의 근교에서 자랐고 어릴 때 가끔 병으로 누워있을 때가 있었다. 이때 정다운 친구는 10폭의 동양화 병풍이었다. 항상 벽가에 드리워 있었는데 넓은 파노라마로 펼쳐진 풍경이 좋았다. 병풍그림은 상상력과 흥미를 유발시키는 단서가 되었다. 이런 추억이 훗날 미술을 시작한 잠재된 동기로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중학교 시절 나의 인생에 값진 기회는 김봉기 미술선생을 만나고 부터였다. 그는 진주 사범학교에서 독학으로 배운 분이었다. 1961년에 대한민국의 1인당 실질국민총소득(GNI)은 82달러, 1964년에 103달러로 당시 전업화가가 되는 것은 고된 직업이었다. 어려운 시절에 선생은 개인화실을 마련하지 못해 방학중에 교실 한쪽에서 그렸다. 이 때 선생은 잔심부름을 시켰는데 유화작업을 보는 기회를 얻었다. 회화의 기초가 되는 다견(多見)을 시작한 셈이다. 다문과 다습은 후일에 시작했다. 당시 선생은 “너도 나중에 그림을 한번 그려 보거라”라는 지나가는 말을 해 주었다. 이 말은 장차 페인팅을 늦게 시작한 강한 유발동기가 되었다. 내가 고교를 진학한 해에 선생은 드디어 1964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나는 30대에 서예선생으로부터 3년간 한문서예를 배운 적이 있었다. 주로 해서와 행서였고 왕희지, 안진경 및 조맹부 서체를 썼다. 서양화나 서예는 거의 같은 예술의 경지로 안목과 수련 및 스타일 등의 개발방법은 같다고 보인다. 나는 1960년대에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하였다. 간부가 되고 중년이 되자 발령을 받고 객지생활을 했다. 40대에 해안에 위치한 발전소로 부임하면서 혼자 사택생활을 했다. 차츰 바다의 매력이 눈에 아름다운 실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관심의 대상에 안목이 생기자 그림 그리는 욕구가 일었다. 평범한 사실을 비범하게 볼 줄 아는 안목이 바로 예술가의 첩경이라고들 말한다. 그리고 또한 남들도 인정하듯이 비범하게 표현하면서 감동까지 줄 수 있다면 더없이 훌륭한 예술가가 되는 길이었다.
내가 다닌 직장은 미술대전을 개최하였고. 풍경화를 출품했는데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서양화 부문에서 금상을 탈 때는 본사 사장으로부터 받았다. 연이어 두 번의 금상을 받고 용기를 얻자 페인팅에 진입했다. 심사위원은 홍익대 미술대학 출신의 김경렬 화백이었다. 자신의 개성을 살려 그림을 그리는 것과 나만의 멋을 터득하도록 내적 안목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충고를 받았다.
지금부터 25년 전 1990년대에 산업사회는 인터넷 시대가 되었다. 윈도우 95가 출시되고 2000년대에는 PC의 상용화가 진행되었다. 나는 유화를 시작한지 10년동안 작품이 많아지자 2000년도부터 웹진에 홈페이지를 구축했다. 나의 작품과 서구 화가들의 생애와 작품을 올렸다. 자연히 심도 있는 자료와 미술을 공부해야 했다. 홈페이지가 인기를 얻자 트래픽 용량이 증가하고 호스팅 비용문제와 업로드 파일에 한계가 따랐다. 2010년에는 IT 환경에 아이패드와 삼성의 갤럭시 태블릿이 출시되었다. 이는 종래 산업의 주도권이 하드웨어와 통신에서 소프트웨어와 콘텐츠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 온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유화를 소재로 초상화와 인물화 장르를 좋아하고 공부했다. 그리고 외국 화가들의 도서와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방법을 택했다. 또한 미국초상화가협회(ASOPA)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영국의 Saatchi Gallery 및 미주의 Artbreak 등 웹사이트에도 등록하여 작품을 올리고 정보를 얻었다.
과거 당진군에 근무할 때는 박기호, 장철석 화가들과 친교를 이루었다. 그들은 아마추어에게 멘토가 되어 주었고 뉘앙스를 크게 받았다. 또한 풍경화 작품을 미협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다. 작년에는 장철석 화백으로 부터 전시회에 초대를 받았다. <당진을 그리다>라는 지방주의 전시에 참여하고 작품도 당진에 남겼다. 박기호 화백은 추계대 미술대학 출신으로1983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또 프랑스로 유학하여 파리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는 폐교된 초등학교를 구하여 10년이 넘도록 고생하며 지방에서 <아미미술관>을 설립한 장본인이다. 모두 지방 미술계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이바지하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나는 정년퇴임을 하고 초상화 30점 등 총 60점으로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국내에서 드물게 10회의 초상화 개인전을 연 셈이다. 초상화는 작품제작에 대상의 유사성(Likeness)와 정체성(Identity)이 따르는 까다로운 장르로 젊은 화가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
19세기 후반에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나고 국내경제가 부활하자 뒤쳐진 미국의 문화예술을 위하여 많은 예술가와 화가들을 유럽에 진출시켰다. 그리고 선진문화예술을 익혔고 특히 미술 분야는 에콜 데 보자르와 줄리앙 아카데미 및 뮌헨 왕립아카데미 등에서 아카데믹 스타일의 교육을 받도록 진흥했다. 그러나 많은 화가들은 배우던 스타일 대신에 모네의 새로운 모던아트(Modern Art)로서 인상주의를 따랐다. 300명의 화가들은 귀국하여 미국적 인상주의 화풍을 새롭게 이루고 크게 부흥시켰다.
제4회 개인전을 끝내고 갤러리에서 근무하면서 홍익대학교 미술디자인교육원에 입학했다. 지석철 교수가 담당하는 서양화 실기반은 진지한 수업이었다. 수강생 20명 속에 3년을 다녔다. 교수는 극사실주의 화풍을 구사하는 선도적인 화가였다. 그동안 가졌던 많은 의문점과 페인팅 기법을 배웠다.
4회의 초상화 전시로 관심이 많은 화가들이 언론을 통한 기사와 홈페이지를 보고 반응을 보였다. 특히 인물화 화가나 초상화가들이 전시회를 참관하고 서로 연락했다. 그 후 유화를 소재로 하는 <한국초상회화협회>라는 명칭으로 20여명이 결속했다. 2006년에 드디어 국내 최초로 창립전을 한전플라자 갤러리에서 열었다.
2010년은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의 해이다. 2008년부터 안 의사의 순국 100주년의 『대한독립전』을 위해 50명의 초상화 제작계획을 세웠다. 이는 예술가의 사회참여(앙가주망)라는 책임과 또한 초상화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자신의 비용과 계획 및 작업만으로 2년간 준비한 끝에 새로 남산에 건립된 안중근의사 기념관측으로부터 초대전을 허락받았다.
그 후 안양 평촌아트홀에서 대한독립전을 열었다. 전·현직 안양시장 등 유관단체 인사와 많은 관람객이 참석하여 오픈식을 가지고 지방TV도 촬영하여 방영되었다. 두 전시장에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이종찬 부부(이회영 후손), 이종문 가족(이시영의 후손), 안명근(안중근의 동생) 손녀와 외증손녀, 박삼중 스님(안중근의사 유해환국운동전개) 등과 각 독립운동가의 기념관에서 관련인사들이 각각 방문 또는 참석하여 환담과 격려를 받았다.
2010년부터 전 세계가 전자책의 환경으로 급속히 변화되자 처음 종이책을 전자책 발간으로 바꾸었다. 2년간 원고작업으로 2013년에 『모네와 지베르니아이츠,전2권』이라는 전자책을 내고, 연이어 2014년과 2015년에 총 14권을 발간했다. 미국 인상주의 미술에 대한 <시리즈>로 구성된 책은 모두 13권이 되었다.
정부는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하여 현재 외국에서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디지털북페어전 2014, 2015전이 열렸다. 2013년에 1인출판사로 설립한 「아트월드」로 연이어 참가했다. 2014년에는 3권의 도서가 정부의 [2014년 우수콘텐츠 전자책]으로 선정되어 책 표지에 명시되는 타이틀을 얻었다.
나는 칠순을 기하여 막상 화집을 발간하면서 『야외 페인팅의 구성』을 쓴 에드가 페인과 미국의 국민화가이며 독학화가인 앤드류 와이에스(1917-2009)의 『화집, 자서전』 등을 참조했다.
사람은 다섯가지 감각 중에서 시각을 통해 60% 이상의 많은 정보를 얻고 있다. 미술은 이를 손과 붓, 물감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독학화가는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창출하는데 강한 의지와 고집을 지녀야 좋다.
아무쪼록 독자들이나 앞으로 독학화가가 되려는 분에게 본인이 겪어온 과정과 떠오른 생각들이 참고가 되기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