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 요약]
■ 지베르니 그룹 6인
1890년에 지베르니에 도착한 가이 로즈는 이곳에서 장식적 인상주의(Decorative Impressionism)의 스타일을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실현한 화가가 되었다. 그가 지베르니에서 성취한 가장 중요한 일은 인상주의 스타일 안에서 새로운 장르를 다시 개발한 것이었다. 모네와 같이 생활하는 시기를 포함하여 가이 로즈(Guy Rose)는 1890년부터 1904년까지 15년간을 프랑스 파리와 지베르니에서 생활했다. 로즈가 지베르니에 온지 10년 후인 1900년부터 프레드릭 프리세크, 리처드 밀러, 로턴 파커, 칼 앤드슨 그리고 에드먼드 그리슨등의 미국화가들이 도착하여 비교적 오랫동안 정착하면서 로즈의 작품 스타일에 영향을 받고 같이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지베르니에 정착하여 함께 생활했다. 또한 주로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고 완성된 작품은 매년 미국의 뉴욕 등에서 전시를 통해 인기 속에 판매하였으며 다시 지베르니에 돌아와서 다음의 전시를 위한 작업을 계속했다. 특히 프랑스 내에서 이러한 미국 화가들은 스스로 ‘지베르니 그룹「Giverny Group」’이라 칭했다.
장식적 인상주의 작품이란 당시 가이 로즈 등 10명의 화가들이 지베르니의 실외 정원과 실내에서 꽃과 정원을 배경으로 여인이나 가족의 인물을 결합하여 그린 작품 스타일이었다. 특히 작품의 배경에는 햇빛이 쏟아지는 정원에서 시간에 따라 무수히 반사되는 섬광과 같은 색채의 명멸을 개성적으로 묘사했다. 주제는 주로 가족의 인물과 모델 여인의 누드를 그린 것이다. 또한 실내에서도 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햇빛에 비친 인물의 모습을 실외에서처럼 묘사하였다.
이러한 작품 속에 배경이 되는 정원의 꽃이나 잎사귀의 모습은 다소 추상적이며 환상적인 표현기법을 각자 개발하여 개성적인 터치로 그려졌다. 그러나 작품속의 인물은 인상주의 및 사실주의에 가까운 표현방법으로 그리되 배경과 서로 병치되어 전체적으로 참신하고 심미적인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 특색이었다.
1910년에는 이와 같이 새로운 화풍으로 활동한 지베르니의 화가 6명이 「지베르니 그룹 Giverny Group」 이라는 명칭을 스스로 지었다. 그리고 고국인 뉴욕에 건너가서 전시하여 큰 성공을 이루었다. 6명의 화가 자신들도 그들의 화풍이 미술사적으로 새로운 화풍으로 정의될지 몰랐다. 단지 그들의 작품이 뉴욕 등에서 전시를 통해 큰 인기를 얻은 결과였다. 그들은 실내에서도 인상파가 추구하는 빛(光)과 색(色)의 조화 및 대상(對象)과 면(面)의 구성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는 빛이 충만한 자연속에 인간을 포함시킨 것이었다.
되돌아 올라가면 이렇게 생긴 새로운 장르는 사실 모네가 처음으로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인상주의는 그림의 대상에 대하여 빛과 색채의 변화에 따라 사실주의와 달리 다소 주관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작품에는 심미적으로 추상적인 이미지가 일부 묘사되는 회화 기법이다.
추상화를 최초로 개발한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1896년에 모네의 『건초더미』를 모스코바 전시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 때 사물에 비친 햇빛의 추상적인 표현과 함께 사물자체가 가진 중요성을 지워 버린 것에 대하여 영감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한 적이 있었다. 또한 인상파는 기능적으로 장식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 지베르니의 장식적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위와 같은 추상적인 이미지 표현과 더불어 새로 개발된 장식적인 측면 즉 두 가지 요소가 특징적으로 함께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1910년 지베르니 그룹전(6인)과 1911년 장식적 인상주의로 명명
이들 6인은 『지베르니 그룹』이라는 전시회 명칭으로 1910년 5월 7일부터 5월 20일까지 뉴욕의 『메디슨 갤러리』에서 역사적인 인상파 전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인상주의를 널리 보급시켰다.
이들은 그림의 주제와 화풍이 거의 비슷했고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지베르니에 비교적 오래 거주했으며 그들의 작품 스타일이 혁신적이었고 고국에서도 인기가 높아서 잘 팔려 나갔다.
1895년 이후에 지베르니를 방문한 인상주의 스타일의 화가들 중에 특별히 색다른 스타일의 화가들이 있었다. 즉 프레드릭 프리세크 등은 주로 정원의 여인을 그리는 장식적인 화풍의 화가들이었다.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정통적인 인상파 스타일이면서 이와 다른 색다른 스타일을 모네가 정착한 지베르니에서 미국 화가들에 의하여 창조해 낸 셈이다.
전시가 끝난 1년 후인 1911년에야 프레드릭 프리세크의 친구이며 미국의 미술 비평가이며 수집가인 크리스천 브린턴이 미술사적으로 처음 ‘장식적 인상주의’(Decorative Impressionism)라고 명명(命名)했다. 오랜 인상파의 실험 끝에 새로운 인상파의 장르가 새롭게 정의되고 탄생한 것이다. 즉 자연속에서 인간의 조화를 인상파의 새로운 스타일로 창작한 것이 장식적 인상주의로 인정을 받았다.
이는 1874년 4월 25일에 파리에서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진지 37년이 지난 후였다. 당시 프랑스의 미술비평가인 루이 르로이가 클로드 모네의 유화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들 두고 사르바리(Le Charivari)지에 기고한 비판적인 뜻으로 사용한 것에서 유래했다.
모네가 주도하여 1874년에 시작된 인상주의의 분파를 살펴보면,
신인상주의(新印象主義 Neo-Impressionism)는 1890년대에 점묘주의 화법을 사용하여 과학적인 색채분할을 쇠라와 시냐크가 시도한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後期 印象主義 Post-Impressionism)는 1880년대에 인상주의에 반(反)하는 화풍으로 고흐, 고갱, 세잔느 등으로 각각 화가의 화풍은 다르지만 1910~1911년에 런던에서 프랑스의 미술을 영국에 소개하는 [마네와 인상파 이후의 화가들 Manet and the Post-Impressionists]이라는 전시에서 영국의 화가이며 미술평론가인 로저 엘리옷 프라이(Roger Eliot Fry 1866~1934)가 명명한 것이다. 전시화가들은 ‘인상주의’라는 전시명칭을 거부하고 ‘후기 인상주의’라는 명칭을 선정했다. 당초부터 전시화가중에는 전통적인 인상파들이 제외되었다.
장식적 인상주의란 인상주의(印象主義)와 신인상주의(新印象主義) 화가들이 장식적이고 아카데믹한 기법을 인물에 적용하여 그리는 방법을 설명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화가들의 작품은 실내에서 창가의 자연광에 의해 명멸하는 인물과 야외에서 여성의 나른한 포즈를 강한 채색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고도의 장식적인 그림의 대부분은 배경에 있는 패턴을 강하게 표현하고 일본의 예술이나 자포니즘에서 영향력을 받았다. 제1세대의 장식적 인상파 화가들은 창시자들로서 약 1905년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인기가 있었다. 이러한 스타일은 이들 화가들의 제자들이 작품을 통해 20세기 중반까지 계속 스타일이 이어졌다 또한 일부는 현대의 비유적인 인물화가들에 의하여 최근 몇 년 동안 부활되고 있다 .
■ 제2세대(The Second Generation) 장식적 인상주의
그 후 장식적 인상주의는 미국에서 제2세대 (The Second Generation)인 로버트 루이스 레이드(Robert Lewis Reid 1862-1929), 시어도어 니콜라이 루키츠(Theodore Nikolai Lukits 1897~1992), 크리스천 본 스나이다우 (Christian Von Schneidau 1893~1976)등의 현대적인 인물 화가들이 이어 받아 부활하였다.
■ 1895년 이후에 지베르니에 정착한 ‘장식적 인상주의’(裝飾的 印象主義) 화가들
가이 로즈는 미국에서 캘리포니아 디자인 학교를 거쳐 1888년에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르페브르와 콩스탕 밑에서 아카데믹 미술을 수학했다. 지베르니에 초기인 1890년에 와서 1891년까지 생활했다. 다시 여류화가인 부인 에텔 보드멘과 결혼하여 1894년, 1899년을 살았다. 또한 미국 생활 중에 로빈슨의 권고로 지베르니에 되돌아 갈 것을 듣고 1904년~1912년까지 9년 동안을 지베르니에서 지냈으며 도합 13년을 생활했다. 부인은 따로 1923년에도 지베르니에 다시 와서 생활했다. 그는 19세에 파리에 와서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학교의 모든 미술상을 받았던 재능이 특별한 화가였다.
리처드 밀러는 1889년에 워싱턴 미술대학을 거쳐 1899년에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로랑스와 콩스탕 밑에서 아카데믹 미술을 수학했다. 그는 파리에서 미술상을 받자 콜라로시 아카데미의 제의로 영예로운 교수생활을 했다. 또한 31세에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00년 초기부터 1914년까지 15년간 지베르니에서 주로 정원의 여인을 그린 장식적 인상주의 화가였다.
로턴 S. 파커는 미국에서 시카고 미술재단을 거쳐 1888년에 에콜 데 보자르와 그 후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1902년에 지베르니에 와서 1913년까지 12년을 생활했다. 정원의 여인을 그리되 이름난 누드화를 많이 남겼다.
프레드릭 프리세크는 1893년에 시카고 미술재단을 거쳐 1895년에 뉴욕 아트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했다. 1898년에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전통적인 아카데믹 미술을 배웠다. 1906년에 지베르니를 방문하여 부인 사라 앤 오브라이언과 함께 정착하고 1919년까지 14년간을 살았다. 1915년에는 파나마 태평양 국제박람회에 출품하여 대상을 받았다. 프리세크는 지베르니의 햇빛이 있는 정원에서 여성과 도발적인 누드를 그렸다. 그는 미국에서는 전혀 그러한 스타일의 작업을 하지 못한 화가였다. 지베르니에서는 어쩌면 다른 곳보다 그림 그리는 환경이 더욱 자유스러운 곳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에드먼드 W. 그리슨은 1899년에 뉴욕 아트스튜던트 리그를 수학했다. 부인 페테드 에톨 부스와 함께 1907년부터 1909년까지 3년을 지베르니에서 살았다. 그는 귀국하여 맨허튼의 살마군디 미술클럽에서 미술에 기여한 공로로 100만불을 수상했다.
칼 엔더슨은 미국에서 시카고 미술재단을 거쳐 1900년에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그리고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도 수학했다. 1909년에서 1911년까지 3년을 프리세크의 권유로 지베르니에서 부인인 메리 헤스와 같이 생활했다. 그는 여성 이미지의 누드와 햇빛이 얼룩진 실외 포즈를 힘차고 명멸하는 듯 한 붓놀림으로 그렸다.
알슨 스키너 클라크는 파리의 카르멘 아카데미에서 미국화가인 제임스 휘슬러 밑에서 수학했다. 1910년에 부인 아타 메도라 멕뮤란과 함께 지베르니에 와서 가이 로즈와 다른 화가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생활했다.그는 귀국하여 미국으이 옥시덴탈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여류화가인 폴린 레너즈 팔머는 미국에서 시카고 공립학교에서 미술을 배우고 1900년 파리에서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그녀는 시카고 출신의 성공한 초상화, 풍경화 및 정물화의 화가로서 1910년에 지베르니에서 생활했다.
루이스 리트먼은 러시아 출생으로 이민 온 화가였다. 미국에서 시카고 미술 아카데미와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를 거쳐 1900년에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를 수학했다. 시카고에서 동료인 파커가 격려하여 1911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인 1928년까지 19년간 지베르니에서 생활했다. 귀국하여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젊은 여인이 햇빛에 얼룩진 야외와 밝은 실내에서 옷을 입거나 누드로 포즈를 취한 작품을 제작했다.
로버트 루이스 레이드는 미국에서 1884년에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를 거쳐 1885년에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블랑제, 르베브르 밑에서 전통적인 아카데믹 미술을 수학했다. 그는 귀국하여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의 교수로 활약했다. 그는 지베르니를 거치지 않았으나 제2세대의 장식적 인상주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