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구치 안고
니가타 현 출신으로 본명은 헤이고다. 어렸을 때부터 유치원도 제대로 가지 않고 골목대장으로 온갖 장난을 쳤다. 1926년에 도요 대학 인도철학과에 입학했으나 가혹한 수행 때문에 깨달음 얻기를 포기했다. 1930년에 친구들과 동인지 『말』을 창간했으며 이듬해에 발표한 「바람 박사」가 마키노 신이치의 절찬을 얻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편의 가작을 발표하지만 세평은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1946년에 전후 일본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악, 통찰한 「타락론」, 「백치」의 발표로 일약 인기 작가가 되었다. 전후 세상을 반영한 소설과 수필, 탐정소설, 역사연구 등 다채로운 집필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세청과 싸우기도 하고 경륜의 부정사건을 고발하기도 하는 등 실생활에서도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에 뇌일혈로 급사했다.
다카미 준
1907년에 후쿠이(福井) 현의 지사인 사카모토 산노스케(阪本?之助)의 서자로 후쿠이 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다카마 요시오(高間芳雄).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30년에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노동운동에 참가했다가 1933년에 검거되어 전향했다. 유치 중에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달아나 이혼했다. 전향과 가정붕괴의 이중고 속에서 쓴 「잊지 못할 옛 친구」가 제1회 아쿠타가와(芥川) 상 후보작이 되어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요설적 설화형식을 주장하여 기성 리얼리즘의 극복을 추구했으며 장편 「어느 별 아래서」와 평론 「문학 무력설」로 인텔리 작가로서의 독자적 지위를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현대사의 동란 속에서 자신을 상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 전후에 쓴 일기가 귀중한 기록으로 남았다. 일본근대문학관 창설과 자료수집에 진력했다.
다자이 오사무
일본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까지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다.
다자이 오사무는 아오모리 현 쓰가루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신흥 지주였다. 도쿄 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문학적으로는 아쿠타가와의 영향을 받아 출발했으나 고교 시절에는 좌익문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1933년, 동인지 『해표(海豹)』에 「어복기(魚服記)」, 「추억(思ひ出)」을 발표하여 주목받기 시작했다.
1935년에 대학 졸업에 대한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신문사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떨어져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이후 복막염에 걸려 중태에 빠졌는데 그 치료과정에서 진통제인 파비날 중독에 걸린다. 그러는 동안 제1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오르나 낙선하고 만다.
첫 번째 작품집인 『만년』에 수록된 이 시기의 작품들은 여러 소설 작법을 시험한 다채로운 것들이었다. 단편집 『여생도(女生徒)』로 기타무라 도코쿠 상을 받았으며 전쟁 중에는 고전 및 그 외의 것에서 재료를 얻은 것이 많았고 순문학을 고독하게 지켰다.
고향에서 패전을 맞았으며 「판도라의 상자」 등의 작품에서 시국에 편승하는 자유사상에 반발하고 참된 인간혁명을 기원했다. 상경 후 저널리즘의 각광을 받았으며 「비용의 아내」, 「사양」, 「인간실격」을 써서 무뢰파라 불렸다. 1948년 강물로 뛰어들어 세상을 떠났다.
다나카 히데미쓰
도쿄에서 출생하여 어머니의 집안인 다나카 가에 호적을 올렸다. 가마쿠라에서 성장했으며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대학 재학 중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조정선수로 출장했다.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올림포스의 과실」을 썼다.
주재원으로 있던 당시 경성(현, 서울)에서의 체험, 형님의 영향으로 입당한 공산당에서의 체험, 애인과의 신주쿠에서의 생활이 문학의 배경에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수면제 중독에 걸렸으며 1949년 11월 3일에 다자이의 무덤 앞에서 자살했다.
오다 사쿠노스케
오사카 출생. 제3고등학교에 5년 재학하다 중퇴했다. 「비」로 다케다 린타로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결혼 후 「부부 젠자이」를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권선징악」 등 역작을 차례로 발표했으나 장편 「청춘의 역설」이 반군국주의 작품으로 발금처분을 받았다. 1946년에 패전 직후의 혼란스러운 세상을 묘사한 단편을 발표했으며, 사소설의 전통에 결별을 선언한 평론 「가능성의 문학」을 집필, 그 실험적 작품이라 여겨지는 장편 「토요부인」을 『요미우리신문』에 8월부터 연재했으나 연말에 객혈,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모든 사상이나 체계에 대한 불신, 옛 전통에 대한 반역을 목표로 삼았으며 고유의 감각과 직관에 바탕을 둔 스탕달풍의 템포가 빠른 작풍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