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아빠의 갑작스런 죽음, 그리고 친구들의 따돌림……. 빅터는 언젠가부터 세상일이 다 낯설고 어색할 뿐이다. 빅터의 유일한 즐거움은 도시 한복판에 버려진 화물역을 탐험하는 것. 평소와 다름없이 인적이 끊긴 폐허 속을 돌아다니던 어느 오후, 빅터는 자기처럼 외톨이인 늑대 한 마리를 마주한다. 엄마는 늑대를 보았다는 빅터의 말을 믿어 주지 않지만, 빅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늑대에게 ‘떠돌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주고 그 모습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낮에도 밤에도,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온통 늑대 생각뿐이다.
어느새 해가 지붕 위에 나지막이 걸려 있었다. 5월 말이라 낮이 한층 길어졌다. 빅터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쐐기풀을 툭툭 쳤다. 자작나무 줄기들이 석양에 주홍색으로 빛났다.
그때 빅터의 눈에 그 동물이 들어왔다. 늑대였다.
덩치는 다 자란 셰퍼드와 비슷해 보였지만, 몸매가 훨씬 더 늘씬하고 다리가 길었다. 몸 전체가 재색과 갈색 털로 뒤덮여 있었는데, 목 부분의 털만 희끄무레한 빛을 띠었다. 뺨은 석양빛을 받아서 그런지 붉은 기운이 살짝 감돌았다.
제 딴에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양쪽 귀가 납작하게 누워 있는 걸 보니, 잔뜩 경계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늑대는 자작나무 숲과 선로 사이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빅터와는 겨우 6~7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늑대는 차분한 눈빛으로 빅터를 바라보았다.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호기심 어린 눈길로 보아 새끼 늑대인 것 같았지만, 왠지 옛이야기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이 어른스러워 보이는 구석도 있었다.
빅터는 온몸에 짜르르하게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손은 저릿저릿하고, 팔뚝과 등줄기에는 소름이 돋았다. 늑대는 갑자기 몸을 휙 돌리더니 총총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나타날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불쑥 사라져 버렸다.
(중략)
그날 밤 빅터는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아까 그 늑대가 자꾸만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정말 개를 보고 늑대라 우기는 걸까? 그렇다면 왜 그런 느낌이 들었지? 그 순간에 벼락을 맞은 것 같았는데…….
신기한 일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는 거다. 왠지 그 녀석과 함께라면 말 한마디 없이도 마음이 잘 통할 것 같았다. 14~16쪽
*슬픈 소식
야생 공원 검역소 우리에 갇힌 떠돌이! 빅터는 야생 공원 자원 봉사를 하면서 떠돌이를 원래의 삶터로 돌려보내기 위해 잃어버린 늑대를 찾는 남자를 찾아가 보고, 멸종 위기 동물들을 매매하는 장사치들의 불법 행위를 밝혀내는 등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사는 온통 ‘공익을 해치는 맹수에게 언제 죽음의 주사를 맞힐까?’라는 문제뿐이다. ‘안락사’는 떠돌이에게 목숨이 달린 문제이지만, 사람들에게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달린 정치적 도구일 뿐이다.
“안락사 말고 다른 방법은 없나요?”
엄마는 초록색 스크랩북에서 늑대 구조 센터에 관한 기사를 꺼내 아저씨 앞에 내밀었다. 그 기사에서는 구조 센터가 그 어디에서도 자리를 찾지 못한 늑대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콘라드 아저씨는 힘겹게 입을 떼었다.
“구조 센터에도 연락을 해 봤어요. 자리가 다 차 버렸다더군요. 이미 결정된 일이에요. 안타깝지만 다른 방법은…….”
아저씨는 눈물을 글썽이는 빅터를 보고서 말을 멈췄다.
“미안하다.”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 세 사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엄마는 빅터가 제일 두려워하는 질문을 꺼냈다.
“그럼 언제……?”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루이틀 뒤가 될 수도 있고, 며칠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거니까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예를 들어……, 농부와 사냥꾼은 늑대가 서식하는 걸 반대합니다. 농부는 가축이 공격을 당할까 봐 불안해하고, 사냥꾼은 늑대와 사냥감을 나누기 싫어하지요. 만약 시장이 농민 단체나 사냥 협회와 만날 예정이라면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하려고 할 겁니다. 그러면 단체 측의 환영과 지지를 받을 테니까요. 하지만 환경 보호 단체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면 일단은 그때까지 기다리겠지요. 골치 아픈 일을 겪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101~102쪽
*아름다운 밤
법원의 ‘예비적 금지명령’이 내려진 뒤 최종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빅터는 떠돌이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떠돌이는 도통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빅터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떠돌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때, 즉 낮이 아닌 밤에 떠돌이를 만나기로 계획을 바꾸고, 매일 밤 떠돌이 우리 옆에서 잠을 청한다. 첫째 날 밤을 아무런 성과 없이 보내고 난 뒤, 둘째 날 밤, 빅터는 쇠창살 우리 바로 옆에 매트를 깔고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떠돌이는 놀랍게도 빅터 바로 옆 쇠창살 안쪽에 웅크리고 있다. 이제는 빅터의 손길도 어렵사리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윽고 셋째 날 밤…….
셋째 날 밤, 빅터는 전날과 같은 자리에 쪼그려 앉아 쇠창살 사이로 팔을 내밀었다. 떠돌이가 곧장 달려와 사포처럼 거친 혓바닥으로 손바닥을 마구 핥았다.
그러자 웃음이 터지는 동시에 눈물이 흘렀다. 빅터는 한 손으로는 떠돌이의 털을 쓰다듬고, 다른 손으로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고, 대지에는 풀 냄새와 흙냄새가 향긋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머릿속이 맑게 갠 느낌이었다.
그때 떠돌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가슴속에 억눌린 슬픔을 길어 올리듯 구슬프게 들리는 소리였다. 그 울음소리는 점점 격렬해지는가 싶더니 토악질을 할 때처럼 쿨럭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빅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렸다.
그때 갑자기 숨을 꿀꺽 삼킨 떠돌이가 하늘을 향해 주둥이를 추켜세웠다. 하울링이었다. 빅터의 등골을 타고 전율이 흘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노래를 빅터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떠돌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긴 호흡으로 이어졌고, 빅터의 목소리는 점점 더 그 소리를 닮아 갔다. 마침내 둘은 한목소리가 되어 울부짖었다. 이 울부짖음은 야생 공원 전역으로, 또 공원 밖으로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168~1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