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 신봉자들, 조선을 암흑으로 밀어 넣다!
조선을 야만과 퇴행으로 몰고 간
당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 도서 소개
당쟁의 근본 원인과 본질을 정면에서 해부하다
주희 신봉자들의 ‘당쟁’은 어떻게 조선을 망쳤나?
당쟁이 조선을 쇠락하게 만들고 결국 패망으로 이끌었다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다. 물론 당쟁의 긍정적 영향을 찾는 논의도 있지만, 당쟁이 어떻게 시작되어 사회를 혼란과 퇴행으로 몰아넣었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학계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이한우의 조선 당쟁사』(21세기북스)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조선 당쟁을 ‘왕권을 가볍게 여긴 주희 신봉자들의 권력 투쟁’이라 규정한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과 유학 고전을 연구하며 유학적 정치사상의 핵심이 ‘강명(剛明)한 군주론’에 있음을 간파했다. 태종 등 조선 임금들도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지만, 주자학을 받아들인 조선 후기 사대부들은 경전의 자구에 매몰되어 신권(臣權)을 중시하며 왕권에 대항했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 분열하고 극한 분쟁을 일으키며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 과정이 조선 당쟁의 역사다.
주자학에서 비롯된 당쟁은 선조 대에 본격화되어 영·정조 시대를 거치며 지속되었다. 그러나 순조 대에 이르러 당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외척이 주도하는 세도 정치로 변질되었다. 이는 당쟁을 극복한 결과가 아니라 권력 구조의 변화였으며, 결국 조선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초래했다. 이 책은 당쟁의 발화부터 세도 정치로 넘어가기 이전까지의 당쟁사 주요 장면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그 본질에 접근한다. 당쟁의 근본 원인과 그것이 조선의 몰락을 어떻게 초래했는지에 대한 성찰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저자는 이 시대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깊이 있고 유연한 사고가 결핍된 사회에서는 교조가 판을 치게 마련이며 철저하고 독립적인 사고가 결핍된 사회에서는 얄팍한 교리에서 비롯된 선동이 쉽게 힘을 발휘한다. 과연 우리는 이 점에서 조선 사대부들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 본문 중에서
이렇게 되면 임금과 재상의 관계도 바뀐다. 국시 이전에는 사안별로 임금이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면 국시 이후에는 임금이 한쪽 당을 고르는 권한만 있고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권한은 그 당에 속하게 된다. 당연히 누가 군자이고 누가 소인인지도 임금이 아니라 당이 결정한다. 임금의 권한은 그저 자기가 선택한 당을 군자당, 선택을 받지 못한 당을 소인당으로 삼는 것뿐이다.
【제2장 | 송나라 도학자(道學者)들의 정치 도구 ‘국시(國是)’를 들여오다 - 85쪽】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헌부·사간원에 포진해 있던 동인 세력들의 일대 반격이 시작됐다. 이이의 불교 관련설, 이이의 형이 연루된 불미스러운 소문 등이 모두 까발려졌다. 또 박순·이이·성혼은 모두 심의겸의 문객이라고 몰아세웠고 박순과 이이는 성혼을 ‘산림고사(山林高士)’라고 치켜세우고 반대로 성혼은 박순과 이이를 일러 ‘일대현신(一代賢臣)’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등 서로 노는 꼴이 볼 만하다고 인신공격성 공세를 강화했다. 선조는 단호했다.
【제5장 | 동인과 서인이 부침(浮沈)하는 선조 전반기 - 150쪽】
당초 동서 붕당이라고 할 때 동인 쪽에는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고 서인 쪽에는 이이·정철·성혼의 문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후 세자 건저의 사건을 계기로 서인에 대한 일대 숙청이 이뤄져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일으킬 때까지는 권력 중심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대신 정여립 사건과 겹쳐서 서인에 대한 치죄(治罪)의 정도를 놓고 동인 내부에서 온건파와 강경파가 분열하게 되었다. 이황 계통의 사람들은 온건파인 남인을 형성했고 조식 계통의 사람들은 강경파인 북인을 형성했다. 임진왜란 때도 류성룡이 이끄는 남인은 화친을 주장했고 이산해가 이끄는 북인은 주전론을 내세웠다.
【제9장 | 임진왜란과 당쟁 - 225쪽】
인조 정권은 절대다수 서인과 극소수 남인 참여로 이뤄졌다. 그런데 문제는 정사공신 책봉과 더불어 이미 서인 내에 큰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정변에 참여한 서인은 공서(功西), 정변에 참여하지 않은 서인은 청서(淸西)로 나뉘었다. 공서는 아무래도 인조의 뜻을 받들며 통치 안정을 위해 남인이나 심지어 북인까지도 정권에 참여시키려 했다. 청서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다른 당파가 가져간다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그 중심인물이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이다.
【제14장 | 인조반정으로 ‘신하 나라’ 조선이 탄생하다 - 304~305쪽】
그러나 이미 단 한마디로 정곡을 찌르는 일언가파(一言可破)의 숙종은 제4라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단하의 수정본을 읽은 숙종은 “(영의정 김수흥이) 선왕(先王)의 은혜를 망각하고 (송시열이 제기한) 다른 의논을 부탁했다는 말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실려 있는데 지금 이 행장에는 끝내 싣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뜻이냐?”고 몰아세웠다. 마침내 이단하로서는 피하려야 피할 데가 없었다.
【제19장 | 서인 영수 송시열을 제압하는 어린 임금 숙종의 강명(剛明) - 397쪽】
이처럼 정조는 탕평으로 새로운 정치를 꿈꾸었지만 특정 당파 앞에 사실상 굴복하면서 자기 시대를 마무리했다. 게다가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 1765~1832년)과 사돈을 맺어 안동 김씨 외척 정치 시대를 본인 손으로 열어놓았다. 그로 인해 당쟁 시대가 끝나고 외척 세도정치 시대가 열렸다.
【제24장 | 정조 탕평책의 허와 실 – 5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