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 소개
이천 년 동양 역사 서술의 표준을 만든 불멸의 고전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 삼가주 완역 해설판
삼가주 완역으로 가장 완벽한 『사기』를 만나다!
천 년간 이어진 『사기』 연구의 결실
동양 고전을 새로운 안목으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작업을 진행해온 이한우가 이번에는 사마천의 『사기』를 번역했다. 가장 큰 특징은 ‘삼가주’를 번역했다는 데 있다. 『사기』를 사마천의 원작 그대로 읽고 이해할 수는 없다. 압축적인 고문(古文)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맥락, 인물 관계나 배경, 고대 지명·관직·풍습이 설명 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고대 기록을 참고했는데, 그 출처를 자세히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특정 문장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하고 다른 기록과 비교하며 사마천의 서술 의도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또한, 방대한 시대를 다루면서 연대 불일치, 지명 혼동, 전설과 역사 혼합 등 오해의 여지를 남겼다. 그래서 후세 학자들은 다른 사서와 비교하고 문자를 교정하고 역사적 해석을 제시하며 사마천 『사기』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이러한 『사기』 주석 중 가장 권위 있는 세 가지인 배인(裴駰) 『사기집해(史記集解)』, 사마정(司馬貞) 『사기색은(史記索隱)』, 장수절(張守節) 『사기정의(史記正義)』를 묶어 삼가주(三家注)라 한다.
“『사기』는 삼가주를 통해 완성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기 읽기에서 삼가주는 필수적이지만 그 내용이 난해하고 분량이 방대해서 번역하려는 시도조차 적었고 따라서 삼가주를 뺀 번역이 대부분이었다. 『이한우의 사기』는 총 10권, 4,484쪽에 달하는 분량으로 삼가주를 완역하여 포함으로써, 독자들의 깊이 있는 『사기』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 본문 중에서
양자가 세워진 지 4년이 되었을 때, 지백(知伯=智伯)이 조씨(趙氏)・한씨(韓氏)・위씨(魏氏)와 함께 범씨・중항씨의 옛 땅을 전부 나눠 가졌다. 진나라 출공이 화가 나서 제나라와 노나라에 알린 뒤 이들 네 경(卿)을 치려고 했다. 네 경은 두려워서 드디어 함께 출공을 공격했다. 출공은 제나라로 도망가다가 길에서 죽었다. 지백이 마침내 소공(昭公)의 증손 교(驕)를 세우니 이 사람이 진(晉)나라 의공(懿公)이다. 지백이 더욱 교만해져서 한씨와 위씨에게 땅을 요구하니 한씨와 위씨는 그에게 내주었다. 조씨에게도 땅을 요구했으나 조씨는 주지 않았는데 (앞서) 정나라를 포위했을 때 양자가 지백에게 당했던 치욕 때문이다. 지백이 화가 나서 드디어 한씨와 위씨를 거느리고 조씨를 공격했다. 조양자는 두려워서 마침내 진양으로 달아나서 그곳을 지켰다.
【조세가(趙世家) 제13 - 31쪽】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臣臣父父子子].” 공이 말했다. “좋도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다면, 설사 곡식이 (많이) 있다 한들 내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 다른 날에 또다시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물었는데, 공자가 말했다. “(좋은) 정치란 재물을 절약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경공이 기뻐하며 장차 이계(尼谿)라는 밭을 갖고서 공자를 봉해주려 했다.
【공자세가(孔子世家) 제17 - 190쪽】
한(漢)나라가 일어나고서 여아후(呂娥姁)가 고조(高祖)의 정후(正后)가 되고 아들은 태자가 되었으나 만년에 미모가 시들자, 사랑이 식어서 척부인(戚夫人)이 총애를 받고 아들 여의(如意)가 거의 태자 자리를 대신할 뻔한 일이 몇 차례 있었다. 이에 고조가 붕하자 여후(呂后)는 척씨를 족멸하고[夷] 조왕(趙王)을 주살했으니, 고조의 후궁 중에서 총애를 받지 못하거나 소원했던 자들만 무탈했다[無恙=無頉].
【외척세가(外戚世家) 제19 - 269쪽】
고조(高祖)가 패공(沛公)이 되어 처음 일어났을 때 발(勃)은 중연(中涓-시종관)으로서 고조를 따라 호릉(胡陵)을 공격해 방예(方與)를 떨어뜨렸다. 방예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그들과 싸움을 벌여 적을 물리쳤다. 풍읍(豐邑)을 공격했다. 탕(碭) 동쪽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쳤다. 군대를 돌려 유현(留縣)과 소현(蕭縣)에 주둔했다. 다시 탕(碭)을 공격해 깨뜨렸다. 하읍(下邑)을 떨어뜨릴 때는 맨 먼저 성루에 오름으로써[先登] 오대부(五大夫-20등급 가운데 아홉 번째) 벼슬을 하사받았다.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제27 - 405쪽】
이 때문에 형세는 강해지고 왕실은 안정되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특별한 것이 없으므로 따로 논해 드러내지 않는다. 연나라와 제나라의 일은 굳이 실을[采]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삼왕(三王)을 책봉한 일을 보면 천자는 공손하고 겸양했으며 여러 신하는 마땅함을 지켰으니, 문사(文辭)가 빛나고 아름다워서[赧然=華美] 심히 볼 만했다[可觀]. 이 때문에 세가(世家)에 덧붙였다.”
【삼왕세가(三王世家) 제30 - 4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