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년 동양 역사 서술의 표준을 만든 불멸의 고전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 삼가주 완역 해설판
삼가주 완역으로 가장 완벽한 『사기』를 만나다!
천 년간 이어진 『사기』 연구의 결실
동양 고전을 새로운 안목으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작업을 진행해온 이한우가 이번에는 사마천의 『사기』를 번역했다. 가장 큰 특징은 ‘삼가주’를 번역했다는 데 있다. 『사기』를 사마천의 원작 그대로 읽고 이해할 수는 없다. 압축적인 고문(古文)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맥락, 인물 관계나 배경, 고대 지명·관직·풍습이 설명 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고대 기록을 참고했는데, 그 출처를 자세히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특정 문장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하고 다른 기록과 비교하며 사마천의 서술 의도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또한, 방대한 시대를 다루면서 연대 불일치, 지명 혼동, 전설과 역사 혼합 등 오해의 여지를 남겼다. 그래서 후세 학자들은 다른 사서와 비교하고 문자를 교정하고 역사적 해석을 제시하며 사마천 『사기』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이러한 『사기』 주석 중 가장 권위 있는 세 가지인 배인(裴駰) 『사기집해(史記集解)』, 사마정(司馬貞) 『사기색은(史記索隱)』, 장수절(張守節) 『사기정의(史記正義)』를 묶어 삼가주(三家注)라 한다.
“『사기』는 삼가주를 통해 완성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기 읽기에서 삼가주는 필수적이지만 그 내용이 난해하고 분량이 방대해서 번역하려는 시도조차 적었고 따라서 삼가주를 뺀 번역이 대부분이었다. 『이한우의 사기』는 총 10권, 4,484쪽에 달하는 분량으로 삼가주를 완역하여 포함으로써, 독자들의 깊이 있는 『사기』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 본문 중에서
연나라 혜왕은 실로 이미 악의를 의심하고 있던 참에 마침 제나라의 반간책을 듣고는 마침내 기겁(騎劫)으로 장수를 교체하고 악의는 불러들였다. 악의는 연나라 혜왕과 사이가 좋지 않아 교체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주살될까 두려워 드디어 서쪽으로 가서 조나라에 투항했다. 조나라는 악의를 관진(觀津)에 봉하고 칭호를 망제군(望諸君)이라고 했다. 악의를 높이고 총애함으로써 연나라와 제나라에 경고해 흔들려고 한 것이다[警動].
【악의열전(樂毅列傳) 제20 - 13쪽】
굴원(屈原)은 이름이 평(平)이고 초나라 왕실과 성(姓)이 같다.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로 있었다. 들은 바가 많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博聞彊志] 다스려질 때와 혼란스러울 때[治亂]의 일에 밝았고 외교문서[辭令]를 쓰는 데 탁월했다[嫺]. 궁궐에 들어가서는 임금과 함께 나랏일을 도모하고 토의해 밖으로 호령(號令)을 내었으며 궁궐을 나와서는 빈객들을 접대하고[接遇] 제후들을 응대(應對)했다. 왕이 그를 깊이 신임했다.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제24 - 103쪽】
장이와 진여가 처음에 모든 것이 부족하고 힘들던 시절[約時]에는 목숨을 걸고서 신의를 약속했는데도 어찌하여 서로 돌아보고 의심하는 일이 생겼는가? 두 사람이 나라를 근거지로 삼아 권력을 다투게 되기에 이르자 결국 서로를 멸망시켰으니, 어찌 옛날에는 서로 그리워하며 서로를 써주던 열렬함[慕用之誠]이 있었는데도 뒤에는 서로 등을 돌려 멀어졌는가[盭=戾=違]? (이는) 어찌 그들이 권세와 이욕[勢利]만으로 사귄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명예가 높고 빈객이 많았다고 해도 두 사람이 말미암은 길은 아마도 태백(大伯)이나 연릉계자(延陵季子)와는 달랐다고 할 것이다.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제29 - 246쪽】
지금 한왕은 천자가 되고 횡은 도망친 포로[亡虜]가 되어 북면해 그를 섬기게 되었소. 그 치욕스러움[媿]이 참으로 너무도 심하구려. 또 나는 남의 형을 삶아 죽였는데 그 동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같은 군주를 섬겨야 하니, 비록 그가 천자의 명령을 두려워해 감히 나를 괴롭히지는 못한다고 해도 나 홀로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겠소? 또 폐하께서 나를 보고자 하는 까닭은 그저 내 얼굴과 모습을 한번 보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오. 폐하께서 낙양에 계시니, 지금 내 목을 베어 30리를 말로 내달리게 하면 모습은 아직 썩지 않아 오히려 알아볼 수 있을 것이오.”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찌르면서, 빈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목을 받들고 사자를 따라가서 고제에게 바치게 했다.
【전담열전(田儋列傳) 제34 - 346쪽】
양릉후(陽陵侯) 부관(傅寬)과 신무후(信武侯) 근흡(靳歙)은 모두 높은 작위[高爵]에 올랐다. 고제를 따라 산동(山東)에서 일어나 항우를 공격했는데, 적의 이름난 장수를 주살하고 군대를 깨뜨리며 성을 함락한 것이 십수 차례였지만 곤욕을 겪은 적이 없었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내려준 것[天授]이었다. 괴성후(蒯成侯) 주설(周緤)은 마음을 잡아 쥐는 바가 굳건하고 발랐기 때문에 의심을 받은 적이 없었다. 상이 출정하려 할 때마다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때가 없어서 마치 마음을 다친[傷心] 사람과 같았다고 하니, 마음이 도타운 군자[篤厚君子]라고 말할 수 있겠다.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부관・근흡・괴성 열전) 제38 - 4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