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선일보와 함께 한 38년 7개월은 대한민국 역사와도 맞물려 있다. 이 기간 동안은 대한민국이 가장 발전하고 승승장구한 때였고, 조선일보와 나는 정치권력과 싸웠고, 두 거대 야당에 맞서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를 폭파해 숨통을 끊어버리라는 북한 정권의 협박과 공갈, 반(反) 대한민국 세력이 결집한 ‘안티조선’ 세력의 준동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내가 한 것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p.13)
이때 박 대통령이 우리 두 사람에게 봉투를 주었다. 봉투에는 ‘대성하시라’는 메모와 함께 당시로서는 관행인 전별금이 들어있었다. 이후 10·26이 나고 청와대 출입기자 전별금이라는 관행 자체가 사라졌다. 나는 송효빈 기자와 함께 박 대통령으로부터 마지막 전별금을 받은 기자였던 셈이다. 그때 받은 봉투와 메모는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p.81)
지금 관점으로는 “김대중을 김대중이라고 쓰지도 못하고 동교동이 뭐냐?”고 우습게 볼 수 있
다.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한국 전체 언론과 조선일보의 수치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동교동’이라고 쓰면서 김대중의 존재와 역할을 한 줄이라도 내주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동교동’이라는 표현은 그나마 한국 언론과 조선일보가 언론 자유를 위해 애를 쓴 흔적이다. (p.83)
사실 ‘이원집정부제’라는 용어가 한국 정치계와 언론계에 쓰이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외교·국방은 대통령이, 내치는 총리가 담당하는 제도를 어떤 용어로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헌법학자 김철수(金哲洙) 교수의 저작을 훑어보게 됐고, 거기서 (내가) ‘이원집정부제’라는 적절한 용어를 발견했던 것이다. (p.94)
지면을 보니 기가 막혔다. 그때까지 본, 아니 지금까지 내가 본 김일성 사진 가운데 가장 잘 나온, 가장 잘 된 사진이었다. 윤전기는 이미 세워져 있었다. 김일성 사진은 다른 사진으로 교체됐지만 이미 가판을 보고 들이닥친 안기부 요원들이 그냥 갈 리 없었다. (...)요원 중의 하나는 “아 이제 알겠다. 북한에서 내려온 최고 간첩이 바로 네 놈”이라며 나를 신문(訊問)했다. 요원들의 손과 발이 마구 들어왔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김일성 사진을 게재한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p.117~118)
연수회는 내가 제안한 <좋은 아침 좋은 신문 조선일보>라는 구호를 편집국 기자들 모두가 열창한 후 회의를 마쳤다. 이 구호는 그 후 조선일보 홍보 문구로 정해지고 광화문을 향한 조선일보사 구관 입구의 대형 전시판에 붙여져 오랫동안 전시, 홍보됐다. 이 밖에도 나는 “신문에도 품질이 있습니다. 조선일보”라는 선전 구호 등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각 지하철역이나 TV를 통해 광고되기도 했다.(p.127~128)
김일성은 이 날 오전 10시 몽골 주석을 영접하기 위해 평양공항에 나타났다. ‘세계적 특종’이 ‘세계적 오보’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튿날 조선일보 1면 제목은 「김일성은 살아있었다」였다. 이 날짜 지면 편집을 마치고 나는 사표를 들고 사장실로 찾아갔다. 방우영 사장에게 “조선일보 독자들에게 큰 실망과 불신을 안겼다. 책임을 지고 편집국을 떠나겠다”고 했더니 방 사장은 “모든 신문이 오보를 했는데…‥더욱 열심히 하라”고 했다. 또 한 번 “미안하고 멋쩍고 고마웠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p.148)
너무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방 회장과 함께 했던 시간이 한국 언론이 가장 빛나던 시기, 구체적으로는 조선일보의 황금기였다는 점이다. 방 회장은 ‘4등 신문’이었던 조선일보를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부동의 1등 신문으로 성장시켰다. 나는 그와 함께 하면서 조연 역할을 약간 했을 뿐이지만 그 기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조선일보에서 기자, 차장, 부장, 편집국장, 편집인, 대표이사를 지냈지만 내 이력은 단 한 줄로 정리가 가능하다. 그것은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조선일보 기자로 퇴직하다’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벅찰 정도로 뿌듯한데 더욱이 ‘방우영 시대의 기자’였다는 점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p.155)
특종의 기억은 달콤하다. 기자라면 누구나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특종을 꿈꾼다. 하지만 그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 역시 기자 시절 크고 작은 특종도 해보았고, 낙종을 하여 고개를 들지 못했던 아픈 기억도 있다. 하지만 편집국장으로서 내 평생의 가장 큰 특종, 잠을 못 이룬 채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안고 이룬 특종은 이용호 부장이 건진 「벤 존슨 약물 복용」이었다. (p.179)
10월 2일 저녁 올림픽 폐회식이 열리고, 화사한 불꽃이 서울 밤하늘을 수놓던 그 시간,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나의 뜻을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오래 전부터 굳힌 결심입니다. 편집국장으로서 가장 행복할 때 물러나고 싶습니다.” (p.181)
2003년 12월 31일 조선일보에서 정년퇴임했다. 조선일보에서 38년 7개월을 보내며 스물일곱 청년이 예순다섯 초로(初老)의 사내가 됐다. 나는 조선일보에서 가장 긴 이력서를 갖고 있었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단 한 줄의 가장 짧은 이력서로 충분하다. 수습기자에서 출발하여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마무리되는 동안 내 이력은 단 한 줄 ‘조선일보 기자’였을 뿐이다. (p.383)
달과 잣나무가 꿋꿋한 기상과 영원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달은 없어졌다가도 다시 성장해 만월이 되고, 끝없이 회귀한다. 잣나무 역시 겨울을 이기고 늘 변함없이 푸른빛을 가진다. 그렇게 영원한 기상을 가진 기파랑이라면 출판사 이름으로는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p.391)
방파제에 뚫린 구멍을 작은 주먹으로 막는 동화 속 네덜란드 소년의 심정으로 출판을 시작합니다. 이성적인 사고와 비판의식,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자신의 논리를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는 지성적 분위기를 널리 확산하기 위해서는 종이 문자 이상의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그것이 미력하나마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p.392)
여기서 처음 밝히는 사실이지만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내게 제의가 들어왔다. 1995년 12월의 어느 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며 집무실로 찾아갔더니 김영삼 대통령이 내게 비서실장을 맡아주도록 종용했다. 하지만 나는 신문기자로 일생을 끝내고 싶다, 공직 경험도 없고 비서실장을 맡을 그릇도 안 된다고 완곡히 거절했다. (...)이런 일에 일체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장관 등 공직을 제의한 데 대해 거절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썼다.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줄 지 모르나 그렇다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p.427~428)
나는 결심했다. 우리 사회의 한 귀퉁이에서나마 통일을 위해 남은 생애를 바쳐보자고 다짐했고, 내 인생의 마지막 봉사라는 각오를 하며 조선일보의 제의를 수락했다. 설립준비금 1천만 원을 1호로 내면서…. (p.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