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한가운데에서 피어나는 인간에 대한 진심
오랜 시간을 넘어 되살아난 주군과 신하의 아름답고 선연한 숨
인간을 포용하는 너른 시선과 시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포착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과 그 내면을 그려내는 작가 이현수. 그가 이번에는 더욱 묵직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 『나의 마지막 조선』을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 ‘역사’ 장르로 선보인다.
소설은 가장 혼란하고 무력했던 시기로 기록되는 조선 말기를 배경으로 한다. 운명처럼 내시의 길에 들어서게 된 인물 ‘반석호’를 중심으로 궁궐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 그 속에 얽힌 인간의 욕망과 갈등을 세밀하게 펼쳐 보인다. 무엇보다 신분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 그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선을 오가며 쌓이는 감정의 더께를 세심한 문장으로 되살려 ‘진심’이라는 무게에 추를 단다.
『나의 마지막 조선』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재현을 넘어 입체적인 인물, 치밀한 서사 구성을 통해 새로운 시선으로 마지막 조선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작가는 희화화되거나 하찮은 인물로 여겨지는 내시의 이미지를 전복하여 청아하고 기품 있는 인물로 그린다. 또한 기존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내시가 되어가는 과정을 세세히 묘사함으로써 제국의 몰락 속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러한 시선의 확장은 소설에 재미를 더해줄 뿐 아니라, 비극의 한가운데에서도 삶의 아이러니를 웃음과 연민으로 감싸안는 작가의 색채와 어우러져 인간의 존엄이라는 메시지를 더 선명히 드러내며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시대의 격랑 속에 더 굳건히 세워지는 충정의 마음
비장하면서도 서늘하고, 격렬하면서도 애잔한
스러져가는 조선의 마지막을 선연히 그려낸 역사소설
철종이 죽고 흥선군과 조대비가 권력을 잡기 위해 명복(흥선군의 둘째아들)을 왕으로 내세웠던 그때, 아홉 살이던 반석호는 대대로 내시의 계보를 잇는 상선 남수중의 집에 양자로 들어간다. 다섯 살 때 집에서 기르던 잡종견에게 음낭을 물려 고자가 되었으니, 그에게 내시의 삶은 숙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왕의 그림자로 사는 게 어떤 일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석호는 일등내시가 되리라는 꿈을 품고 견습 내시로 궁궐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대궐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음모와 모략, 배반 등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흥선군과 조대비는 서로 견제하며 세력을 다졌고, 내시부는 그들의 세력 다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시부 내에서조차 궁궐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계동파와 장동파, 두 파당 간의 신경전이 계속됐다. 누구를 섬기느냐가 곧 살아남는 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석호의 아버지, 즉 계동파인 남수중이 상온으로 강등된다. 다시 말해 계동파의 입지가 좁아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시부에서의 아귀다툼은 더더욱 심해졌고, 견습 내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수중 대신 상선의 자리에 오른 장동파 오자흔은 자신의 권위를 오래 지키려는 듯 계보를 이을 양대방을 매질하며 훈계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석호는 그때 자신이 속한 세계가 더는 왕을 모시는 존귀한 궁궐이 아니라 존엄이 가장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곳임을 깨닫는다.
우여곡절 끝에 입궐하여 고종을 모시게 된 석호는 자기 나이 또래인 어린 왕을 대면하고 특별한 마음을 품게 된다. 당시 고종은 나라의 명운을 작은 어깨에 짊어지고 청나라 황제와 비교당하며 호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오랜만에 제 나이 또래를 만난 고종은 석호에게만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으며 편히 마음을 열고, 어린 왕과 내시는 궁 안의 부용지와 옥류천을 산책하며 각별한 우애를 쌓는다.
날이 습하면 숲냄새가 짙어진다. 계곡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물냄새, 둔덕의 나무에서 풍기는 아릿하면서도 달콤한 냄새. 전하의 몸에서 나던 백단향 냄새였다.
“너는 무엇으로 충성할 것이야. 나한테 어떻게 충성할 것이야.”
전하의 목소리와 함께 옥류천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가자 그때가 그리웠다. 나는 전하에게 맹세하고 싶었다. 충성과는 결이 다른 나의 특별한 맹세를.(101~102쪽)
제국은 무너졌어도 우리가 절박하게 품은 뜻은
어딘가에 닿아서 흔적을 남기겠지요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내시는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이지만, 인간과 구별되는 비인간적인 존재로 취급받는다. 보아도 못 본 척 눈과 귀를 닫고, 왕과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 석호는 대를 이을 수 없는 신체를 가졌으나, 소설은 바로 그런 결핍에서 비롯된 시선을 통해 마지막 조선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시간이 흘러 고종과 석호도 나이를 먹고, 관상가 박유붕이 누명을 쓰고 피살된 이후 갑신정변의 실패와 김옥균의 죽음, 잇따른 민란과 외세의 압박까지, 연쇄적으로 피바람이 분다. 많은 신하를 잃어버린 고종은 스스로 과오를 인정하고 수치심에 사로잡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간사한 대신들은 왕을 이용하여 권세를 꾀했으며, 그 틈에서 반란을 꿈꾸는 자도 존재했다. 왕은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고, 끝내는 주권을 빼앗기는 상황까지 도래했다. 석호는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목도했으나 왕의 곁에서 함께 마음 아파하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조선은 점점 스러져갔다.
불완전한 육체 때문에 상대의 부족한 부분과 아픈 구석을 훤히 알고 있는 너와 나. 그게 형제인데 우리가 서로의 목숨 기둥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파당을 지어 싸웠구나.(289쪽)
어쩌면 반석호가 고자가 된 순간 내시라는 미래가 정해져 있었듯, 궁궐 내 진실이 침묵으로 덮이는 순간 조선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마지막 조선』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면서도 한 제국의 몰락 속 요동하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든다. 그러나 저자의 시선은 냉정하되 잔혹하지 않고, 비극을 묘사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다. 때로 웃음과 눈물이 공존하는 장면으로 숨을 고르게 하지만, 그 아이러니가 오히려 이 거대한 이야기를 꿰뚫는 축이 되어 독자에게 하나의 물음을 던진다. 무너진 시대에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답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파당을 나누고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첨과 모략을 일삼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 또한 우리 모두의 모습은 아닐지. 그러나 권력의 한가운데에서도 중심을 지키며 진심을 드러내는 반석호를 통해 저자는 보여주고 싶었던 듯하다. 불완전함 속에서 존엄이 드러나는 이 역설을 말이다.
소설을 읽고 나면 오래도록 마음 한편이 서늘해지지만, 그 서늘함 속에서 오히려 인간에 대한 믿음이 피어오르며 뭉클해진다. 그것은 아마도 제국이 몰락하는 어두움 속에서도 따스함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을 향한 믿음에 바탕한 작가의 시선 덕분일 것이다.
“전하께선 무엇이든 잘 감추십니다. 신하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감추십니다. 그러곤 스스로 속였다 안도하십니다. 다만 소신은 그 점이 슬플 따름이옵니다.”
조금 전에 스친 기운이 되돌아와 내 몸을 촘촘히 에워쌌다. 보이지 않는 무명실로 변한 그것이 사지를 친친 묶는 것 같았다. 일순 땅이 흔들리는 진동을 느꼈고, 나는 기꺼이 잠식당했다. 나무가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가지를 뻗듯이 자연스럽게, 때로는 무력하게, 더러는 연민의 정으로 전하를 사랑했다.(253쪽)
특히 왕을 바라보는 석호의 감정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온기로 충만하다. 때로는 연민으로, 때로는 우정으로, 때로는 충정으로. 남성도, 여성도 아닌 내시 석호의 감정에 그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무엇이라 정의하기엔 어려울 수 있지만, 그건 분명 사랑에서 피어오른 감정일 테다.
이 작품은 진심을 말하면 부서지고, 침묵하면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진심의 의미를 다시 일깨운다. 몰락의 기록을 통해 생존의 의미를, 역사의 어둠 속에서도 진실된 가치를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