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상사란 무엇인가
정치사상을 둘러싼 역사
역사는 정치를 설명한다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적 정치의 위기
‘역사의 종언’인가, ‘또다른 시작’인가
정치사상사란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다양한 방식을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류사에서 벌어진 수많은 갈등과 그로부터 인간의 생각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건들 즉 역사를 제대로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의 신간 『서양 정치사상사』는 현대사 교수이자 지성사가(intellectual historian) 리처드 왓모어가 역사의 어지러운 흐름에 놓인 정치사상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면밀히 분석할 수 있는지 소개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역사가 정치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 기획, 행위, 발언에 대한 다양한 인식과 그 일을 실제로 벌였던 사람들의 희망, 비판자들의 두려움 등”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정치사상사가 고유한 연구 분야로 인정받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모든 사회는 한 체계가 발전하는 방식으로 정치사상의 역사를 형성해왔다. 정치사상사는 특정 사회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는 감각을 길러준다는 점에서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지니는데, 무엇보다도 정치적 위기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정치사상의 역사를 알면 정치를 맥락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코젤렉의 『개념사』, 푸코의 통치성……
정치사상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케임브리지학파로서 소개하다
이 책은 케임브리지학파가 제시한 역사 연구 방법론으로만 판단하기보다는 정치사상사의 흐름, 이 분야의 지배적인 접근방식, 정치사상사가 직면할 쟁점들을 소개한다. 케임브리지학파의 방법론은 특정 사상이나 텍스트를 당대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에서 해석하여 그 의미를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저자는 1장에서 역사와 정치의 관계를 설명한다. 특정 사건이나 이념을 이해하려면 그 역사적 상황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2장에서는 1960년대에 들어서 학문적 체계를 갖춘 정치사상사의 정의와 의의를 분석한다. 정치사상사 연구자들의 목적이 과거의 사상을 당대의 사회적·문화적 배경으로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3장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이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가 미리 정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케임브리지학파는 마르크스주의의 목적론적 역사관이 역사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간과하고 특정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편향된 해석을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4장에서는 롤스와 아렌트 등 저명한 정치철학자들의 연구법을 소개한다. 이들은 과거 사상가들의 생각을 현대의 개념과 기준에 맞춰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학파는 이러한 현재주의적 접근이 과거 사상의 고유한 의미와 역사적 맥락을 간과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5장에서는 케임브리지학파를 대표하는 스키너, 포콕, 던의 연구 방법론을 간략히 소개한다. 케임브리지학파의 연구에 영향을 준 코젤렉과 푸코는 각각 6장과 7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코젤렉은 『개념사』라는 독창적인 연구 방법을 통해 특정 개념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왔는지를 탐구했다. 푸코는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을 활용하여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분석하며 시대의 지배적인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지를 밝혀냈다. 8장은 지구적 관점에서 정치사상을 바라보며, 과거를 단순히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하거나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접근하는 연구는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이는 역사의 맥락을 간과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일을 방해하며 결국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저해하는 몰역사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서 제목은 ‘정치사상사(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이다. 이 책이 ‘정치사상사’가 아니라 ‘서양 정치사상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유는 「역자 후기」에 담겼다.
정치사상사라는 학문의 한계로 지적되어온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며 비서구권 연구들도 함께 언급하려 노력했던 왓모어 입장에서는 서운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학문적 성과나 언급되는 저자들이 거의 모두 유럽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며, 거대한 서구의 학문적 전통의 뿌리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_「역자 후기」에서
정치사상사와 『사회계약론』(1762)의 관계,
수많은 역사에서 정치사상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념의 역사인 정치사상사를 소개할 수 있는 책으로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을 꼽는다. 루소의 진정한 생각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일이 바로 정치사상사의 목표 중 하나라는 생각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라는 『사회계약론』의 첫 문장은 자유와 속박과 관련해서 정치사상사에서 끝없이 논쟁된 주제다. 왓모어는 정치사상사적 관점에서 루소를 혁명가라는 꼬리표로만 판단하기보다는 곧 닥쳐올 문제들과 그 시대의 병폐를 진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현실의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루소는 전 세계의 작은 공동체들을 지키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작은 공동체는 사람들이 폭력에 덜 노출되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이러한 공동체들이 제국을 열망하는 상업 사회의 발전으로 어느 때보다 위기에 처했다고 예상한다. 『사회계약론』은 미완성의 책이라고 말할 정도로 루소는 스스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하지만 “한계, 불확실성, 의도치 않은 결과, 실패”를 정치적 지혜로 여겼을 루소의 통찰은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는 때일수록 사회에 정치사상사가 필요한 이유를 암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루소는 과거와 현재의 정치 상황에 현실적이었다. 그는 냉소가(Cynic)라고 불렸는데 전쟁 없이는 인간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대한 위기를 겪어야만 정치에서의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고 여긴 루소의 책은 그 당시 역사에 대한 고찰과 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비친다. 한 사상가 혹은 정치사상사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정치에 대한 여러 전제들을 재구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위기로 가득해지고 있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가 앞으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럴수록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은 중요하고 긴급해진다. 과거에도 비슷한 곤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정치와 관련해서 과거 세대는 모든 것을 겪었고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정치사상사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