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철학의 딜레마에 질문을 던지다
20세기 현대 철학 이야기의 운을 떼면서 『찰리의 철학 공장』이 더듬어보는 때는 1936년. 그해 3월 나치 정권은 무력으로 라인란트를 점령했고, 스페인 내전이 격화되면서 마침내 연말에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이에 개입한다. 또 독일과 일본은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을 목표로 하는 반코민테른 협정에 참여하는 등, 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전 세계에 유례없는 대규모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철학의 혁신을 부르짖던 후설이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을 출간하고, 후설과는 다른 관점에서 철학의 혁신을 말했던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기 시작한 때도 1936년. 또한 그해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 출간되었는데, 이는 자유주의적 시장 정책의 실패이자 자본주의의 위기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을 배경으로 한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가 발표된 해이기도 하다.
『찰리의 철학 공장』은 “현대 철학은 왜 구체적 현실로부터 멀게 느껴지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 철학의 전문적 논의들이 사실 ‘철학의 위기’라는 절박한 현실에서 비롯했음에 주목한다. 저자는 근대 철학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비롯한 현대 철학의 문제의식을 20세기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조명하기 위해, 온몸으로 시대의 페이소스를 담아내며 당대의 장면들을 포착한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빌렸다. 동시대를 바라본 철학과 예술의 프레임이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현대 철학의 위기의식에 공감하고, 어렵고 까다롭게만 보였던 현대 철학의 밑그림을 조망하면서 세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찰리 채플린과 함께 걷는 20세기 철학 기행
“철학은 이 세계에 관한 그 어떤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일 수 있을까?”
근대 이전의 철학이 명실상부하게 ‘이 세계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었다면, 현대 철학은 위의 질문에서 다시 출발한다. 신화와 종교로부터 이성적인 형이상학으로 그리고 객관적인 과학으로, 인간 이성의 장대한 발전사는 그렇게 한발 한발 내딛어왔지만, 결국 오늘날 우리는 ‘철학의 진정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앞에 다시 서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근대 과학의 발전과 그로 인해 빚어진 철학의 자기 정체성 위기, 그리고 그 위기에 대응한 현대 철학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다.
20세기 철학은 모든 진리 판단의 주체이자, 도덕적 선악의 판결자, 나아가 역사적 진보의 추동력으로서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이성’의 붕괴에 직면한다. 《모던 타임즈》는 그 몰락의 역사에 대한 희극적 증언이다. 과학 기술의 상징인 기계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그 기계는 오히려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과학은 우리 시대의 표준이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과학적 지식은 언제든 오류로 판명날 수 있는 잠정적 지식일 뿐이다. 신성한 힘이 사라지고 세속적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권위는 이미 무너진 뒤이다. 이성에 대한 신뢰(계몽주의)를 광기에 대한 맹목(전체주의)이 대체한 《위대한 독재자》의 몰락과 부흥은 이러한 상실감과 불확실성에 대한 이중적 상징이다.
인간은 더 이상 이성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게다가 세계를 설명해줄 것이라 믿었던 과학조차도 ‘확실성의 위기(수학의 토대 위기)’에 봉착하자 철학은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현대 철학은 그렇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시대를 조롱하는 《살인광 시대》를 거쳐 금맥처럼 새로운 문젯거리들을 쏟아내는 《황금광 시대》를 맞이한다. 그 모색의 한가운데에 바로 ‘과학과 철학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 설정’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가능한 대안은 분석철학(철학을 근대 이래로 발전해온 새로운 학문이념, 즉 자연과학에 맞는 형태로 혁신하는 것), 현상학(과학보다 더 엄밀한 철학을 통해 과학의 불완전한 객관성을 극복하는 진정한 의미의 객관성을 확보함으로써, 철학의 근본적인 이상을 되살리는 것), 실존철학(철학은 과학과 하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바로 그런 관점에서 과학이 탐구하지 못하는 혹은 탐구할 수 없는 종류의 앎을 추구하는 것)의 세 갈래 길이었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사이, 현대 철학의 모색들
이쯤 읽어온 독자는 현대 철학이 왜 까다롭고 어려워졌는지를 실감할 것이다. 특히 분석철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철학 같지 않은 낯선 예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수학의 역리(패러독스)를 모르고는 수학의 토대 위기를 이해할 수 없고, 게슈탈트 논쟁을 모르고는 철학의 대상에 대한 엄밀한 분별이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와 하이데거의 시어(詩語)와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논제 등, 과학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철학의 정체성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던 현대 철학의 모색은 계속해서 다변화되었다. 오히려 가장 토대가 되는 과학에 의지해서 하나의 거대한 이론 체계로 이 세계를 설명하는 꿈을 꾸기까지에 이르렀으니, ‘통섭’ 프로젝트가 이런 경향에 서 있는 최근의 대표적인 연구이다.
반면 근대 과학의 기저에 깔린 실증주의를 정면으로 공격한 후설은 보다 철학의 근본으로 파고든다. 비록 보편타당한 진리란 것이 도대체 있는지 회의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원초적인 학문의 이상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는 않으므로, 현상학이야말로 보편성을 지향하는 제1철학의 역할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유한하고 개별적인 인간에 주목한 실존철학이 있었다.
철학은 정답이 아니라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어느 때보다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고 무수한 사조가 명멸한 20세기를 ‘철학 공장’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현실에 밀착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나 역설적으로 공허해져버린 현대 철학의 아이러니가 비극성과 희극성이 공존하는 채플린의 영화와 닮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찰리의 철학 공장』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 또한 채플린 영화의 처절한 우여곡절 끝 한결같은 해피엔딩에 있다.
신성한 권위에 대한 거부, 보편적 이성에 대한 조롱, 진리와 지식의 세속화…… 현대 철학은 얼마만큼 진지하게 진리를 탐구할 수 있을까? 자본의 위력 앞에서 무력한 과학 기술,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지식의 상업화, 상대주의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포스트모던’한 철학적 태도 등 현대 철학이 넘어야 할 산은 얼마나 많이 남은 것일까?
저자는 묻는다. “왜 철학은 우리 삶에 대해 더 이상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러고는 대답한다. “신성한 철학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고. 20세기 초 철학의 위기를 말하던 사람들의 다양한 대안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여전히 위기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다시 희망을 말한다. 절망을 등에 업고도 힘찬 발걸음을 내딛던 찰리의 뒷모습처럼,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이 우리 희망의 이유이고, 선택과 결과 역시 우리 몫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