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의 감각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대형 선박 절단 사건의 진실은?
출생에 대한 태생적 감각과 거대한 세계의 균열이 교차하는 SF 단편
제12회 대한민국 과학소재 단편소설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김민주 작가의 신작 SF 단편소설 「배니싱 트윈」이 구구단편서가ONE 시리즈로 황금가지에서 출간되었다.
작품의 제목이자 이야기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은 임신 상태의 쌍생아 중 하나가 다른 쌍둥이나 모체에 흡수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직역하면 ‘사라지는 쌍둥이’라는 뜻으로, 유전적 결함이 있거나 임산부 몸에 무리가 될 가능성이 있는 태아가 임신 초기에 자연 유산되어 징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배니싱 트윈」은 이처럼 ‘어딘가에 남아 있지만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의 흔적에 천착하며 살아온 화자의 개인사를 토대로,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선박 절단 사건과 맞물려 확장되는 세계의 비밀을 흥미로운 발상과 섬세한 감성으로 풀어 나간다.
차원과 존재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을 종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파격적인 설정과 이미지로 담아낸 이색적인 종말의 풍경
흥미로운 가설로 고유의 세계관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배니싱 트윈」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온갖 이채로운 이미지와 심상으로 가득하다. 조카의 탄생과 외할머니의 죽음이라는 경사와 상사가 혼재한 풍경부터 단면이 매끈하게 잘린 대형 선박의 형체까지, 온갖 모순되고 뒤틀린 상황과 충격적인 풍경들이 나열된다. 나아가 서로 무관해 보이던 개인의 탄생 비화와 거시적 재난이 중첩되면서 인류의 종말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특히 화자의 마지막 소회를 에필로그 형식으로 연출한 후반부는 그 모든 이미지를 관통하며 환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녹차빙수 작가는 권말에 수록한 리뷰를 통해 ‘재난 생존자’로서의 주인공 심리에 집중하며,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인간의 정서를 거대한 물리적 파국과 쌍둥이 소실 현상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전달하는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전한다.
줄거리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현서는 어느 날 자신이 담당하는 화장품을 싣고 오던 대형 화물선이 두 동강 났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전달받는다. 자세한 사고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파손된 선체 일부가 인양된 현장에 방문한 그녀는 오차 없이 직선으로 반듯하게 잘려 나간 거대한 컨테이너의 풍광에 압도당하고, 그 순간 두려움과 해방감이 뒤섞인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출생 비화를 늘 의식하고 살아왔던 그녀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세계의 진실을 거침없이 추적해 나간다.
본문 중에서
―“주변의 모든 소음이 먹먹하게 배경에 흡수되었다. 자로 잰 것처럼 앞이 댕강 잘려 나가 뒤쪽 절반만 남은, 한때는 거대한 선박이었을 고철 덩어리가 내 눈앞에 있었다. 한낱 인간인 내가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되며 볼 수조차 없을,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의 뼈와 근육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위압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선박을 등진 채로 최신 브리핑을 하는 앵커가 티끌처럼 보잘것없어 보였다. 티끌이 아니라면 바람에 휩쓸릴 수 있을 만큼 하찮은 초파리쯤 되려나.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한 방울 섞인 기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내 삶에서 한 번은 꼭 일어나야 하는 필연적인 일을 마침내 마주한 듯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이후 내 몸과 마음의 반응에 충실하기로 했다. 이 비슷한 사건들의 연이은 발생이 모종의 이유로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고, 이에 저항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윤리를 근거로 지탄받지 않도록 밖에서는 관련 주제를 먼저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까지도 이 충동을 부정하는 짓은 그만둔 것이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내가 굳이 그들을 이해시킬 필요도 없었다. 내 삶은 어떻게든 흘러가야만 했다.”
―“쌍둥이 둘 중 하나가 임신 초기에 자연 유산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유전적 결함이 있거나 임산부의 몸에 무리가 될 가능성이 있는 태아는 징후 없이 사라지고, 이런 태아를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이라고 한다. 직역하면 ‘사라지는 쌍둥이’. 쌍둥이 중 하나가 엄마의 몸이나 다른 쌍둥이에게 흡수되기 때문에, 배니싱 트윈을 설명할 때는 부모가 아기를 잃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사라진 쌍둥이는 어딘가에 남아 있지만, 또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구구단편서가ONE 소개
‘구구단편서가ONE’ 시리즈는 신진작가와 기성작가의 다채로운 단편소설을 출간하는 황금가지의 전자책 브랜드입니다. SF, 판타지, 호러, 로맨스, 추리,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는 한 편의 단편소설에 감상의 폭을 더해 줄 리뷰를 함께 곁들여, 짧지만 충만한 재미와 여운을 만끽할 수 있는 이야기의 참신한 스펙트럼을 제시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