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위의 길, 소통 속의 사유가 빚어내는 투명한 삶의 진실
인간의 삶을 사유하고 우주와 교감하는 소설가 한승원의 ‘영원한 시간을 소유한 소설’
1968년 단편소설 「목선」으로 등단한 이래,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다작의 작가로 문학에 대한 결코 식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한승원의 새 소설집 『희망 사진관』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한승원은 최근 몇 년 동안, 1년에 소설을 비롯한 시집, 소설작법, 산문집 등의 책을 두세 권씩 발표하며 고희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활발한 활동 중이다. 과거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전집으로 묶거나 판형을 달리하여 새로 펴내는 것도, 이러한 그의 문학을 향한 열정과 더불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활발한 창작 활동의 반증일 것이다.
이처럼 많은 책을 펴낸 작가지만, 소설집은 실로 오랜만에 만나보는 것이라 반가움이 남다르다. 장흥 토굴로 내려가 『초의』 『원효』 『추사』 『다산』 등의 장편을 쉼 없이 내놓았던 한승원은 『희망 사진관』을 통해 영혼의 귀를 갖게 된 노작가의 귀향기를 풀어놓는다. 특히 발표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작품에서부터 발표하지 않은 작품까지 모두 10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이번 소설집은 그간의 장편에서 보여주었던 역사적 인물들, 이방인 예술가의 삶에서 비껴나 서민적이고 가벼운 이야기, 곁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소박한 삶이 담겨 있다. 아니, 어쩌면 소박하다는 것은 잘못될 생각일는지 모른다. 특별한 누군가가 아닌 우리 이웃이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이지만, 그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우리를 깊은 사유의 세계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한승원의 이야기가 가진 힘이 여기에 있다. “우주의 교통 교감을 통해 좋은 소설을 써야” 하는 것이 그의 길, 그의 운명이라면, 『희망 사진관』에서 작가는 이웃의 삶을 통해, 길 위의 자연을 통해 우주와 교통 교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 사진관』에는 철학이나 사상 그 자체에 주목하거나, 생경한 논리를 주장하는 부분이 부각되지 않는다. 『원효』나 『다산』 등을 형상화하며 작가가 보여주었던 사상적 지형도에 비한다면 『희망 사진관』에 형상화된 촌부나 나무, 꽃이란 초라하기 그지없다. 간혹 보이는 불교적 가르침과 깨달음의 진술도 종교적인 무거운 진실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자취와 그 관념에 대한 간절한 시선과 작품마다 내면화되어 있는 작가적 소명에 대한 자의식으로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 사진관』은 작가의 그 어떤 소설보다도 사유로서의 시간과 소통으로서의 길에 대해 인식론적인 통찰을 이끌어내고 있다.
_오윤호, 해설 「어느 인문주의자의 꽃, 갈, 토굴」에서
몇몇 편을 제외하고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의 무대가 모두 작가가 살고 있는 장흥의 해산토굴인 것은 작가의 토굴 생활이 세상과의 단절이 아닌 소통의 장이 된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감각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물질적 경계 너머의 실존적 진리를 그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이번 그의 소설집은 자연의 진실을 읽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작가의 삶이 이야기가 되고, 이 이야기는 철학이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스스로의 삶은 아우르고, 우주와 교감하며 글을 쓰는 작가의 집념이야말로 ‘영원한 시간을 소유한 소설’을 꿈꾸게 만든다는 문학평론가 오윤호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한승원에게 해산토굴은 고향 마을에 대한 환유이며, 우주의 한복판이다. 작가는 토굴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토굴 속에 갇히지 않았다. 그 퇴행의 발자취가 다시 앞서 나가기 위한 커다란 움직임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우주의 시간에 따라 흐르고 다산(多産)의 글쓰기를 통해 우리와 소통한다. 그런 점에서 해산토굴은 인간의 삶을 사유하고 우주와 교감하는 어느 인문주의자의 자궁이다. “무엇으로서 무엇의 길을 가고 있는가”(「나무의 길」, p. 330)라고 작가에게 묻고 싶다. 작가는 ‘인간으로서 우주의 길을 가고 있다’라고 대답해줄 것 같다.
_오윤호, 해설 「어느 인문주의자의 꽃, 갈, 토굴」에서
『희망 사진관』의 사진사는 물론 작가 한승원이다. 독자가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커다란 카메라 앞까지 걸어가면 거기에 독자를 위해 마련된 의자가 하나 있다. 의자까지 걸어가는 길, 독자는 한승원이 찍어놓은 사진들을 마주하게 되리라. 그리고 한 컷의 사진 속에서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것이다. 고추밭에서 당당한 포즈로 찍은 여인의 누드에서는 남성적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회적 폭력을 경험한 한 여성의 외침이 들리고(「고추밭에 서 있는 여자」), 출산 후에 눈물을 흘리는 두 여인의 모습에서는 대리모의 서러움을 넘어선 희망의 읊조림이 들린다(「내 서러운 눈물로」). 새벽에 법당에서 절을 하며 우는 여인의 모습에서는 지난날을 뉘우치며 진실된 삶을 살도록 자신을 위해 비는 소리가 들리고(「꽃뱀」), 의식을 읽고 침대에 누운 남자의 얼굴에서는 나그네새의 고독한 울음소리가 들린다(「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그리고 멀리 사라지는 자동차의 꽁무늬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애틋한 노파의 얼굴에서는 ‘예쁘다, 예쁘다’ 매정한 손주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언어가 들린다(「은빛 하늘」). 시인의 욕심 없는 웃음에선 공격적인 남근의 삶을 포용하는 우주적인 자궁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슬픈 희망의 목소리가(「시인과 농부」), 꽃에 거울을 비춰주는 노파의 모습에선 산 목련꽃 나무에서 흰 꽃송이들이 흰 넋처럼 떨어지는 소리가(「산 목련꽃」), 호탕하게 웃는 사내의 얼굴에선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삶을 다시 찾은 것에 대한 기쁨의 웃음소리가 있다(「해산마을 마이크」).
이제, 독자는 카메라 앞 의자까지 왔다. 그곳에 앉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목소리를 담을 것인지,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