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을 취미처럼, 취미를 전공처럼
30년 가까이 환자를 만나고 수술을 집도한 정형외과 전공의가 그림을 그렸다. 1973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붓을 든 세월도 40년이나 된다. 사람 살리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남부럽지 않은 경력을 쌓아온 의사는 왜 그림을 시작했을까? 조세현 박사 아니, 화가가 그리고 쓴 첫 책 <의사가 그리고 쓴 치유의 미술>을 보면 어느 정도 해답이 나오는 것 같다.
“형태를 바로 보는 법은 바로 정형외과의 수술 과정과 매우 유사해 나의 관심과 흥미를 사로잡았다. 정형외과야말로 골격의 형태학적 이상을 진단하고, 수술로 정확히 교정하는 학문이다. 섣불리 수술을 하거나, 대충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 또는 수술의 부족한 부분을 물리치료가 해결해주겠지 하는 일은 그림으로 치면 데생을 제대로 못한 그림 위에 색칠만 화려하게 바르는 것과 같으며, 이런 실수는 모두 기초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건축 물에 예쁜 색의 벽지를 고르는 것과도 같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정형외과의 수술과 유사하다는 그는 책의 서문에 자신이 왜 그림에 빠져들었는지를 조심스레 밝힌다. 헌데 그것이 수술의 기초와 그림의 기초에 관한 것이다.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선 우선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또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노력과 열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결코 짧지 않은 세월, 그림과 수술을 놓지 않은 그는 기본을 다지기 위해 또 좋은 결과를 위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부단한 노력을 쏟았을 터였다. 그런면에서 그는 타고난 의사요 또 타고난 화가다. 그리고 이 타고난 열정가의 모습은 책 곳곳에 스며 있다.
<치유의 미술> 모두 5개의 소제목으로 나뉘었다. ‘그림, 치유의 풍경이 되다’, ‘붓을 든 의사의 이야기’, ‘나는 세계의 길거리 화가’, ‘매일이 풍경이고, 그림입니다’, ‘27년 정형외과 교수의 희망일기’가 그것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그림을 통해 치유의 의미를 길어 올리는 이야기가 첫 번째 이야기, 그림 그리는 의사의 조금은 소소한 세상살이의 편린이 두 번째, 의사로써 세계 곳곳을 누비며 그림과 함께한 순간들이 세 번째, 의사 그리고 화가 개인의 일상이 네 번째, 오랜시간 수술과 강의를 해온 선배 의사의 자기고백이 마지막 이야기다. 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의사로써 작가의 삶과 화가로서의 일상이 매번 나란하다. 서로의 영역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일상에 그대로 함께 녹아 있다. 그렇다고 두 영역의 구분이 모호해져서 서로를 침해하지도 않는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병원으로 향하며 환자를 만나고 수술을 하고 집으로 향한다. 짐을 싸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 학술회의에 참석하거나 강의를 하고 또 수술을 하고 숙소로 돌아 온다. 간혹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자주 들르는 바에 가서 연주를 듣고 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틈날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심지어는 비행기에서 외국의 길거리에서 스케치를 하고 그림을 그린다. 시간이 날 때는 그림 수업을 가고 또 화구를 들고 교외로 향한다. 그의 시선을 언제나 사람들을 향해 있고 또 풍경을 향해 있다. 일과는 빈틈없이 짜여 있고 긴장감이 일 수 밖에 없는 생업의 현장에 있지만 마음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으며 또 눈은 언제나 타인과 자연으로 뻗어 있다. 그의 의술이 사람을 중심에 두고 있고 그의 그림이 정직하게 풍경을 비추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글을 읽고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중년의 오기나 고집스러움이 아닌 인간적인 미덕을 잃지 않고 살아온 삶의 스승을 만나는 기분이 드는 이유도 아마 그것이지 않을까?
전공을 취미처럼 격식과 아집에 얽매이지 않고 즐기되 또 취미를 전공처럼 기본부터 탄탄히 다지고 노력하는 사람. 27년 차 의사이자 40년 차 아마추어 화가인 조세현의 매력이다.
치료, 치유의 미술이 되다.
“정형외과 의사는 환자의 걸음걸이를 보기만 해도 그 원인이 척추 디스크인지, 고관절, 슬관절 어디의 문제인지, 또는 신경 마비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길을 걷다가, 다리를 저는 사람을 만나면 또 오지랖이 발동한다. 내 명함을 주고, 한번 연락 달라고 한다.”
27년차 정형외과 전공의의 오지랖 발동 고백이다. 수많은 의대생들의 스승이자 대학병원의 학장이자 많은 나라에 자신의 새로운 의술을 교육하고 전수한 약력만으론 지극한 체면 때문에 목뒤가 뻐근 할 것 같은 의사의 대사치곤 친근하고 정겹다. 데면데면 형식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의사들에 익숙해서 인지는 몰라도 거리에서조차 환자를 식별하고 선뜻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은 의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조세현의 <의사가 그리고 쓴 치유의 미술> 책장을 넘기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책의 저자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적인 선의가 곳곳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자신의 가사일을 도와준 이의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 성심성의를 다하고 진료실 밖 노인 환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수술실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책 속의 의사 조세현은 사람 사이의 온기에 주목하는 천성이 따스한 사람이라 환자들과의 관계도 살갑고 격의 없으며 최신 의술을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이를 현장에서 성공적으로 활용해왔다. 그가 바란 대로 ‘실력과 인격을 두루 갖춘’ 의사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국제선 항공기의 스튜어디스는 이착륙시 각각 3분 정도 비상구 옆 승무원 자리에 안전벨트를 매고 승객들을 향해 앉아 있는데, 화가의 입장에서는 이때 이들이 좋은 스케치 모델이다.”
“고속버스를 자주 이용하는 나로서는 약 3시간 동안 어떻게 지루하지 않고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맨 앞자리를 예약하게 되면 버스 앞 유리창을 통해 시원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이때 스케치북과 연필이 있으면 흘러가는 풍경들을 순간순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놓았다가 집에 와서 수채화 물감을 대충 바르면 된다.”
그렇다면 이런 고백은 어떨까? 누가 들으면 붓을 들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화가의 말이거나 어느 곳에서나 감을 잃지 않고 혹은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사람과 풍경을 관찰하는 꽤 성실한, 역시 화가의 고백이려니 할 것이다. 헌데 또 이것이 의사 조세현의 말이다. 27년간 환자를 돌보는 것도 모자라 1973년부터 그림을 배웠다고 하니 올 해로 40년째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마추어 작가인 그에게 그림 또한 생활의 한 축을 고스란히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고백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그는 타고난 열정가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성실한 직업인이며, 그에 못지 않게 차근차근 그림 실력을 쌓아온 솜씨 좋은 화가다. 때문에 그의 수술실은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의사의 실력이 고스란히 발휘되는 현장이며, 그가 붓을 드는 곳은 도시의 카페요, 여행지의 광장이며 거리의 복판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면 진료와 수술, 그림 그리기의 일상으로 빼곡하지만 피로한 기색이 없다. 심지어 해외로 떠난 세미나와 비행기 안에서조차 틈틈이 스케치와 크로키가 빠지지 않는다. 카페나 지하철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는 언제나 붓을 들 준비가 되어 있고 또 언제나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실력 있는 의사다. 그의 그림 그리기가 직업인으로서의 삶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의 직업이 그림에 온기와 인간적인 색체를 부여하며 또 거리에서의 스케치와 화실에서의 데생이 환자들과의 교감에 여유와 활력을 제공하는 이유다. 적어도 조세현 작가에겐 그림과 수술이 서로에게 상생의 효과를 주고 있는 것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이 세상을 담아내는 미술과 교통하는 지점. 의사 조세현의 그림이 치유의 미술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람에 대한 온기와 믿음을 잃지 않은 치료는 곧 치유가 되며 그렇게 담아낸 세상 풍경은 고스란히 작가 자신에게 치료의 자양과 치유의 힘을 부여한다.
그림 그리는 의사의 즐거운 속도
27년 차 정형외과 전공의 조세현의 그림은 섬세하다. 붓질이 간결하고 힘차기보다는 섬세하고 따뜻하다. 그가 진료실을 벗어나 야외로 나가 그린 우리나라 곳곳의 풍경은 햇빛을 듬뿍 머금고 있어 온기가 넘쳐나며 또 자상해 보인다. 아무래도 아마추어의 그림 솜씨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오랜 기품이 느껴질 정도다. 하긴 그림을 시작한지 놀 해로 40년이 되는 그는 자신의 책 <의사가 그리고 쓴 치유의 미술>에 이런 고백을 하기도 했다.
“3월 초인데도 꽃샘추위가 장난이 아니다. 양평의 농가 길옆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그림을 그렸다. 먼 산 위에는 희끗희끗 잔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잔설의 터치를 위해서는 망가질 정도로 오래된 낡은 붓이 좋다. 새 붓으로 흰색을 그리면, 산 위가 전부 눈으로 덮인다. 하지만 낡은 붓으로는 산등성이와 골짜기의 잔설을 드문드문 그럴듯하게 그릴 수 있다. 새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오래된 붓의 거친 표면이 만들어내는 농담의 여유를 자각하는 감각은 손맛이 예민한 의사의 고백이 맞다. 헌데 산등성이의 눈이 빚어내는 골짜기의 틈새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낡은 붓을 준비해가는 모습에선 풍경의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타고난 화가의 면모다. 게다가 거기서 오래되고 낡은 것의 미덕을 발견하는, 또 그것을 아끼는 마음이라니. 풍경의 깊이, 혹은 시선의 깊이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한 곳을 오래 응시하는 이들이 무심하게 흘린 이런 찰나의 말들이야말로 지금의 우리가 알아채 챙겨 넣어야 하는 미덕이 아닐까?
의사이자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한 그의 그림과 말들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의 두 가지 이력만큼 글과 그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의사라는 직업인의 고뇌와 일상이 정직하게 드러나 있으면서도 지하철에서 카페와 버스 안에서 심지어는 비행기와 일본의 사세보, 태국의 치앙마이, 로마 공항과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와 중국의 상해 거리까지 세계 곳곳에서 건져 올린 그림들도 그득하다. 그의 글은 세상을 좀 더 산 스승이 들려주는 말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어렵지 않다. 수술실의 긴장을 풀기 위해 새로운 유머를 개발해가는 그답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노련하면서도 웃음이 끼어들어 친근하다. 풍경화는 풍경화대로 색채가 따뜻하고 섬세하며 크로키와 스케치는 인물의 개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림만으로도 직업인인 그가 어떻게 환자를 대하고 수술을 집도하는지 알 수 있으며 인간적인 풍모와 실력을 위한 성실함이 전해질 정도다. 또 진료실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그의 간결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읽어내는 앞세대의 진지함과 선의가 가슴으로 느껴진다.
1년간의 파리 연수에서 아침의 여명을 만끽하기 위해 생활의 시계를 앞으로 돌려버린 이방인의 이야기, 아내의 병세를 묻기 위해 8시간 동안 마을 타고 사막을 달려온 노인의 모습에서 숙연해지는 남자의 이야기, 혼자 병원문을 나서는 노인들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는 또 누군가의 뒷모습, 카페나 지하철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관찰하고 노트나 핸드폰에 기억해두느라 바쁘고 바쁜 손. 풍경과 사람의 파노라마와도 같은 그의 수많은 그림들을 글과 함께 읽어 내려가다 보면 현대인의 바쁜 일상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피로와 여유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속도에 휘감겨 삶의 피로와 ‘멍한 휴식’만을 노래하는 우리들에게 그는 외려 수술 장갑을 끼고 붓을 들고선 휘파람까지 불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앞세대의 부지런함과 근면이 꼭 무표정하고 지루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듯 조세현은 수술실 밖으로 나와 화구를 들고 유유히 거리 한 복판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림을 그리면서 수술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분신 같은 수술과 미술은 나의 기력이 다하는 순간까지 놓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