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소문
무료함에 동네를 배회하던 형규는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함께 마트에서 장난삼아 과자를 훔친다. 그러나 형규 혼자만 마트 CCTV에 찍혀 관리자가 학교에 찾아와 으름장을 놓으면서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나 몰라라 하는 친구들의 배신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어느 틈에 학교에는 자신이 상습범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방학이라 소문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친 데다, 가족들조차 자신에게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는 통에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다. 외출 금지를 당해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형규는 자신과는 달리 짠한 소문을 달고 다니는 아랫집 꼬맹이 훈이와 엮이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훈이에게 따라붙은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소문’ 그 자체에 깊은 의구심을 품게 된다.
나는 가방을 챙기러 교실로 갔다. 가방을 들고 복도로 나오는데 화장실에서 세현이가 불렀다. 내가 상담실로 불려 간 걸 알고 기다린 것이었다. 나는 세현이가 너무 반가워서 팔을 덥석 잡았다.
“나만 걸렸어. 왜, 왜, 왜 나만 CCTV에 찍혔냐고?”
“우리랑 같이 있었다는 거 안 불었지?”
“안 불었다니까. 그래서 더 억울하다고.”
세현이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넌 입이 무거울 줄 알았어. 계속 비밀 지켜. 셋이 혼날 필요 없잖아. 다 같이 혼나도 달라질 게 없어.”
그 말뿐이었다. 세현이는 어른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내 기분을 위로해 주지도 않았고, 혼자 죄를 뒤집어쓴 내 심정을 알아주지도 않았다. 녀석은 따닥따닥 슬리퍼 소리를 내며 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자신이 마트 일에 걸려들지 않은 게 마냥 즐거운 것 같았다. 내가 지킨 건 비밀이 아니라 의리였다.
“야, 난 이제 어떡해?”
세현이는 이미 계단참을 돌아가서 보이지 않았지만, 불쑥 목소리가 올라왔다.
“너, 빌라 앞에 있는 푸른 문방구 알지? 거기 출입 금지라며? 거기에서도 걸렸냐?”
“갑자기 문방구가 왜 나와? 거긴 전혀 아니야.”
푸른 문방구에 출입 금지라니, 사실이 아니다. 확실한 증거도 있다.
“배형규, 이제 그만해. 그러다가 개망신 당한다.” ―15~16쪽에서
서툰 배웅
지난여름 장마로 불어난 윗못 물에 사고로 친한 친구 병규를 잃은 남중이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아랫못 낚시터인 자기 집에서 지내는 것이 힘겨워 고등학교 진학을 다른 지역으로 할 계획을 세운다. 그날의 기억은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마음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고, 저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죄책감을 짊어진 채 침묵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낚시터를 찾은 미스터리한 소녀 유나의 행동을 오해하는 바람에 남중이와 친구들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병규의 마지막 숨결이 남아 있는 윗못에 오르게 된다. 그제야 아이들은 숨겨 놓았던 마음을 고백하면서 병규를 배웅한다.
낚시터 일이 아르바이트였다면 진작 그만두었을 거다. 한때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낚시터 일이 더 좋았다. 일요일이면 좌대를 오가며 아빠 대신 떡밥을 비벼 주고, 배달 심부름을 하는 틈틈이 낚시를 했다. 지난 6월까지만 해도 나는 지역별로 특색을 갖춘 낚시터를 갖는 게 꿈이었다. 전국을 돌며 수질과 지형에 따라 어종을 달리해서 낚시터를 운영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젠 낚시도, 저수지도 싫다. 맘 같아서는 윗못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막고 저수지에 있는 물도 다 빼 버리고 싶다. 나는 오늘도 손님들이 찔끔찔끔 손맛만 타다가 허탕 치고 돌아가길 바란다.
“치킨은 됐고, 점심은 오리 볶음탕으로 해 주세요. 매운 거에 약하니까 안 맵게 해 주세요.”
여자애가 메뉴에도 없는 오리 볶음탕을 시킨다. 단골은 아니어도 우리 집에 다녀갔던 적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엄마는 주문이 있는 날만 오리 농장에서 생오리를 배달시킨다. 라면을 퍼 담는 아줌마는 뭐가 못마땅한지 한숨만 푹푹 쉬어 댔다.
나는 자전거에 오르며 후회했다. 좀 더 오빠답게 말할걸, 숙성된 얼굴 반만큼이라도 무게를 잡을걸. 그제야 자전거를 하우 집에 두고 온 게 생각났다. 자전거가 밤새 내린 비로 푹 젖어 있을 걸 생각하니 짜증이 올라왔다. 짐바리 자전거는 도저히 안 되겠다. 살짝만 힘을 빼도 핸들이 멋대로 틀어졌다.
아빠 자전거를 가게 앞에 세워 두고 하우네 집으로 갔다. 젖어 버린 건 자전거만이 아니었다. 어젯밤 내 마음도 푹 젖었다. 나는 바짝 마를 만큼 이불 속에 오래 있지 못했다.
지난밤, 하우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걸 술주정이라고 하나? 쪽팔리게시리. ―80~82쪽에서
툰광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그 일 있고 나서 여기 온 적 있어?”
모두 고개를 저었다.
성태는 안장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오성태, 힘드냐?”
“별로.”
병규도 이 길로 자전거를 끌고 갔다. 우리는 병규가 마지막인지도 모르고 걸었을 길을 가고 있다. 아무도 병규가 과수원 너머에 있는 숲으로 들어가는 걸 보지 못했다. 그것만 알았어도 병규를 더 빨리 찾았을 것이다. 병규는 덥고 습한 날씨에 길도 안 좋은 오르막을 자전거까지 가지고서 왜 올랐을까? 사고가 난 후 그 이유가 가장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윗못이 있는 과수원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길은 내겐 두려움이다. 감당하지 못할 감정들이 밀어닥칠까 봐 겁이 났다. 병규가 허우적거리며 땅을 디디려고 안간힘을 쓸 때 나는 선풍기 앞에 누워 뒹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견디기 힘들었다.
“병규가 축구를 많이 해서 다리 힘이 좋잖아. 이 정도 오르막이면 식은 죽 먹기였을 거야.”
툰광이 코를 킁킁거렸다. 다들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과수원이 끝나고 숲이 이어졌다. 굽은 산길을 돌아가면 윗못으로 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성태는 과수원 끝자락에 자전거를 세웠다.
얼굴은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었는데 겁보와 씨름하느라 몸에서는 땀이 났다.
“어뜨케, 프레시향은 왜 하필 윗못이야? 으스스하다.”
“뭐가 으스스하냐? 친구가 있던 곳인데. 무조건 병규가 우릴 지켜 준다.”
성태가 구호를 외치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태 말이 맞다. 병규 옷자락에 쓸리던 풀들이고, 병규가 밟고 간 흙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우와는 또 다른 이유로 이 길이 내키지 않았다. -129~130쪽에서
#구멍
과보호를 받으며 귀한 막둥이로 자란 우현은 가출을 감행했다가 실패한 이후부터 형에게서 구제 불능 구멍 취급을 받기 시작한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자신을 살갑게 돌보아 주었던 다정하고 듬직한 형과의 사이는 어찌해 볼 도리 없이 점점 벌어지기만 하고, 완벽하고 반듯한 가족들과 어울리는 구성원이 되고자 애를 써도 결과는 엉망진창이라 우현의 마음은 한껏 쪼그라든다. 부모님의 연수와 이사를 앞두고 잠깐 허락된 방학 동안의 자유 시간을 마음껏 허비하던 우현은 몇 가지 사건을 통해 가족들과 아버지가 감추고 있던 어마어마한 비밀을 알게 되는데…….
여름까지만 해도 나는 형에게 나름 귀한 동생이었다. 형은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다. 그래서인지 어린 나를 바쁜 엄마 대신 챙겨 주었다. 학원 시간에 맞춰 저녁을 차려 준 것도, 떨어진 실내화를 바꾸라고 돈을 챙겨 준 것도, 고래를 잡는 데 함께 간 것도 형이었다. 형은 내 보호자이자 해결사였다. 당연히 그때의 나는 구멍이 아니었다.
형이 변한 건 내가 여름 방학 때 기태를 꼬드겨 가출을 하려다 걸린 다음부터다. 기태와 함께 아침 일찍 기차를 타기로 했지만 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형에게 걸렸다. 실수로 형 휴대폰을 집어 왔기 때문이다. 당장 집으로 오라는 형 말을 무시하고 늦어지는 기태를 기다렸는데, 잠시 후 나타난 건 기태가 아니라 형이었다.
나는 집으로 끌려가 가방과 주머니를 탈탈 털렸다.
“구제 불능, 이 새끼를 어째야 되냐?”
그날 형은 과하게 화를 냈다. 형답지 않았다. 형은 그동안 내 구멍을 메워 주려고 애를 썼다고 했다.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지, 난 한 번도 내 안에 있다는 구멍을 본 적이 없었다.
“넌 오늘부터 그냥 구멍으로 살아. 나도 지쳤어.”
그날 이후 김필현이 돌변했다. 문제집을 골라 주고 새 옷을 사 주고 언제쯤 면도를 해야 하는지 봐 주던 형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형은 동생을 부려 먹고, 놀려 먹고, 가지고 놀았다. 그러나 그건 둘만 있을 때 얘기다. 겉으로 보기에 우린 벽이 없는 사이좋은 형제였다. 부모님 앞에서 김필현은 여전히 일곱 살 어린 동생을 챙기는 육군 병장 만기 제대에 빛나는 듬직하고 다정한 형이었고, 김우현은 형에게 별명을 붙일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착한 늦둥이 동생이었다. -157~158쪽에서
모든 게 아버지 수첩에 적힌 대로 착착 이루어졌지만, 문제는 나였다.
나는 아버지 계획대로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합격을 했어야 했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새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기태에게는 올해 유난히 고득점자가 몰리는 바람에 커트라인이 높아져서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거라고 말했지만 그건 핑계였다. 난 처음부터 아버지가 골라 준 학교에 갈 성적이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부모님 뜻대로 원서를 썼지만 당연히 떨어졌다. 그다음엔 형이 추천해 준 학교에 응시했다가 학생들이 몰리는 바람에 그곳에서마저 탈락했다. 나는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고교로 입학 배정을 받았다.
결국 통학 거리도 멀어졌고 친구들과도 찢어졌다. 머리카락을 다 쥐어뜯어도 속이 풀리지 않을 상황이었다. 나처럼 엉뚱한 곳으로 고교 배정을 받아서 우는 여자애들 틈에 끼어 나도 엉엉 울어 버리고 싶었다.
게임에서 팀을 짜다 보면 예상치 못한 구멍이 하나쯤 끼게 된다. 상대 팀은 득점을 위해 구멍을 살벌하게 공격하고, 팀원들은 실점만 하는 눈엣가시인 구멍을 더 살벌하게 깐다. 잘하려고 할수록 실수가 늘어나는 게 구멍의 특기다. 구멍은 점점 커진다. 결국 구멍이 있는 팀은 죽사발로 깨져 버린다.
그래도 게임에서는 자신이 구멍인 걸 알면 다음 판에 끼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가족은 가입도 탈퇴도 맘대로 안 되는 이기적인 팀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가족 중에서 구멍은 바로 나란다. 내 편이라고 믿었던 형이 확인해 준 것이라 더 씁쓸하다. 나는 이 겨울, 구멍을 메울 근사한 기회를 놓쳤다. -163~164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