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트 앤솔러지는 작가별 또는 주제별 작품집 형태를 추려서 꾸린 시리즈다. 기존에 출간한 단편선들을 포함하여 지속적으로 고전 장르의 지형을 탐색하려고 한다. 출판 브랜드 '바톤핑크, 아라한, 지구라트'의 조합어인 '바라트'는 산스크리트어로 '빛을 찾는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일상 속에 숨어든 공포를 예리하게 포착해낸 작가, 평온과 정상이라는 외피 속에 은폐된 파멸, 분노, 억압, 불안을 때론 모호하고 부드럽게 때론 살벌하고 잔인하게 드러낸 로다 브로턴. 당대 선풍적이었던 심령현상을 매개체로 ‘무엇’이나 ‘왜’가 아니라 ‘어떻게’로 탁월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브로턴의 고딕 단편 3편을 수록한다.
「오로지 진실만을 The Truth, 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은 로다 브로턴이 1868년에 발표한 자신의 첫 번째 유령 소설이다. 절친 사이인 두 명의 상류층 여성 사이에 오고가는 서간문 형식을 취한다. 빅토리아 시대 일견 번듯하고 평온해 보이는 상류층 여성들의 일상에 숨겨진 공포를 탁월한 감각으로 포착해낸 작가의 대표 단편 중 하나.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한철 동안 머물려는 세실리아, 그녀를 위해 동분서주 집을 알아봐주는 친구 엘리자베스. 예나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 너무 좋은 집이 너무 싸게 나온다면 일단 의심하라. 그런데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엘리자베스도, 그녀보다 더 의심이 많은 세실리아도 결국에는 이 멋진 집의 너무 싸서 ‘미스터리한’ 집세를 받아들인다. 공교롭게도 세실리아가 메이페어의 그 꿈만 같은 집으로 이사 오기 전, 그 집을 구해준 친구 엘리자베스는 병치레를 한 어린 자식의 요양차 해변 휴양지로 떠난다. 이들의 엇갈린 공간으로 오가는 일상적인 편지는 마지막에 갑작스러운 충격과 공포를 위한 빌드업 과정인 셈.
브로턴은 ‘나중에야 알고 보니 악명이 자자한’ 메이페어의 이집에 나타난 초자연성 자체를 묘사하지 않는다.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묘사한다. 이것은 빅토리아 시대 전형적인 유령 소설의 문법과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이 초자연적인 존재는 사회적 계급이나 신분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도 기병대 장교인 건장한 상류층 남자도 공평하게 망가뜨린다.
브로턴이 이 이야기는 실화라고 끝맺음한 부분은 소설적 수사이기는 하나, 이 단편의 소재를 어디서 가져왔는가와도 관련이 있다. 실제로 런던에서 가장 악명 높은 흉가로 알려진 메이페어, 버클리 광장 50번지 건물에 관한 이야기다. 이곳에 출몰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존재, 흥미롭게도 ‘형체 없는 안개 덩어리’, ‘발톱과 촉수를 지닌 끈적끈적한 액체’ 등으로 묘사됐다. 딱 러브크래프트의 취향이다. 물론 러브크래프트도 적잖은 작가들처럼 이 버클리 광장의 흉가를 자신의 두 작품에 일부 차용했다고.
로다 브로턴에게 심령주의는 일상이다. 모녀가 손을 잡고 교령회장에 들르고, 유명한 영매들이 사교계나 상류층 집안에 초청받는 일은 일상의 흔한 풍경이었다. 영국에서 열풍에 가까웠다는 심령주의는 세기말로 갈수록 일상생활과 문화 전반에 짙은 영향을 드리운다. 문학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앞서 소개한 에디스 네스빗에게도, 오스카 와일드에게도 심령주의는 세기말을 변주하는 매혹적인 기제였다.
브로턴은 최면, 예지몽, 영매를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매개로 잘 활용한다. 독특한 제목의 「코가 있는 남자 The Man with the Nose」(1872)는 전체적인 인상이 독특하고 그중에서도 유난히 코가 독특한 남자에게 쫓기는 여자의 이야기다. 여기서는 최면이 중심 역할을 한다. 엘리자베스는 갓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준비하는 새 신부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남자가 자신을 데려가려는 악몽을 꾼 이후로 그녀의 신혼여행은 공포와 불안으로 바뀐다. 사실 그녀는 결혼 전에 어머니와 함께 최면술사의 공연장에 다녀온 적이 있다. 이때 그녀를 본 최면술사가 영매기질이 있다며 최면의 피험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그녀는 그 부탁을 받아들이지만 그 이후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때의 불온한 최면 암시가 엘리자베스의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언뜻 사악한 남자가 최면 암시를 통해 여자를 통제(성적으로)하고, 여자는 속수무책 희생양이다. 그런데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한, 고딕적 포석이 이 단편의 매력을 더한다. 엘리자베스에게 공포와 불안을 주는 대상을 최면과 정체불명의 남자에서 결혼생활로 치환하는 것이 다른 해석의 시작점이 될 것 같다.
프로이트 이전의 ‘꿈’은 여성작가들에게 글쓰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남성들에게 쓸모없는 것으로 버려진 무대를 교두보로 여성작가들은 유령소설을 특화된 장르로 선보이기 시작한다. 최면, 예지몽, 영매술, 강신술 등의 심령현상은 꿈을 통한 여성들의 목소리에 더욱더 자유를 주는 고성능 확성기로 쓰인다. 꿈에서, 최면에 걸려서, 망자의 혼과 접신한 영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목소리는 훨씬 더 날이 섰고 훨씬 덜 제약을 받았다.
「거봐, 꿈이었잖아! Behold, It Was A Dream!」(1872)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브로턴은 유혈이 낭자한 핏빛 살인 현장에 자신의 목소리를 얄미울 정도로 능청스럽고 영리하게 눌러 담는다. 노처녀 다이나는 역시나 같은 처지였다가 늙은 ‘영감님’과 결혼해 행복한 전원생활 중인 친구 제인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는 것. 행동하는 여자 다이나는 곧바로 출발한다. 멀고먼 길을 뱃멀미와 차멀미의 연타에 기진맥진해 도착한 친구의 시골집, 아담하고 안락하다. 친구와 그녀의 영감님도 예상대로 행복해 보인다.
이날 밤 다이나가 너무도 생생해서 진짜 같은 악몽을 꾼 게 문제의 발단이다. 친구 부부가 그들의 방에서 귀에서 귀까지 목이 잘린 채 죽어있는 광경을 본 것. 뿐만 아니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낫을 든 범인의 얼굴까지…… 다이나는 예지몽이라고 불안해하며 친구 부부를 걱정하고, 친구 부부는 불안해하면서도 불쾌해한다.─ 미스터고딕 정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