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한국 경제가 깊은숨을 몰아쉬던 시절, JFK 케네디 공항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이민자들의 치열한 삶의 물결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낯선 땅으로 향하는 첫걸음은 전혀 가볍지 않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여유와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희미한 설렘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유럽과 성지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를 밟아보았지만, 미국은 처음 마주하는 세계였다. 사십여 년을 살아온 익숙한 땅을 뒤로한 채, 비행기가 태평양 위로 길게 몸을 눕히자 가슴 한쪽이 서서히 절여 왔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돌아갈 곳은 없다.”
“그래, 한 번 해보는 거야.”
“힘들어도 끝까지 가보는 거야.”
“아메리카 드림… 그것을 향해.”
나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끝없이 이어진 구름의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김포를 떠난 비행기는 알래스카를 스치듯 지나, 열여섯 시간의 시간을 접어 넣은 채 미국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수많은 불빛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가로등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하는구나.’
그 짧은 생각 하나에, 마음은 이미 그곳에 닿아 있었다.
입국 절차를 마치고 짐을 찾는 순간, 현실이 다시 나를 붙잡았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짐들 속에서 우리는 잠시 허둥거렸다. 알뜰함이 지나쳤던 탓일까, 나는 커다란 이민 가방 두 개를 끌고, 어깨에는 배낭까지 메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결국 ‘혹시 몰라서’라는 이름으로 짐의 무게를 늘려갔다. 남편과 아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짐을 밀고 당겼다. 그때의 나는 믿고 있었다. 이 모든 준비가 언젠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이후 몇 년 동안 우리는 먹을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것도 새로 사지 않아도 될 만큼 준비되어 있었다. 떠나기 전,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붙잡으려 했던 나의 마음이, 그곳에서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히 비상약은 유난히도 많았다. 누군가 아프다고 말하면, 나는 작은 약국처럼 약을 꺼내 나누어 주었다. 감기약에서부터 통증약까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쉽게 줄어들지 않는 그 약들은 마치 나의 불안을 대신 품고 온 짐처럼 느껴졌다.
나는 원래 정리하고 준비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은 이민 생활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은 어느새 나를 작은 기준점처럼 여기게 되었고, 집 안의 질서는 자연스럽게 내 손끝에서 정리되었다.
그러나 모든 준비가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건전지가 비싸다는 말을 듣고 종류별로 챙겨 넣었던 배낭은 출국장에서 멈춰 섰다. 작은 물건 하나에도 경계가 깃든 시대였다. 그날, 나는 준비와 현실 사이의 틈을 조용히 배웠다.
그렇게 우리는 뉴저지 에디슨의 작은 타운 하우스에 둥지를 틀었다. 낯선 주소였지만, 그곳은 분명 우리 가족의 새로운 시작점이었다.
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던 길은 이미 밤에 잠겨 있었다. 창밖은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그저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순간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큰 나무 한 그루. 여름 햇빛을 조용히 막아줄 그 나무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위를, 다람쥐 한 쌍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곳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뒤뜰로 나가자, 싱그러운 초록 잔디 위에 하얀 토끼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누군가의 소유도, 경계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생명들. 그 모습이 너무도 낯설고, 또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서는 눈이 쌓이면 토끼를 쫓아 산을 오르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 차이는 단순한 풍경의 차이가 아니라, 삶의 방식의 차이처럼 느껴졌다.
공원에는 다람쥐들이 넘쳐났고, 땅에는 도토리가 셀 수 없이 떨어져 있었다.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발끝에 전해졌다. 이곳의 다람쥐들은 굳이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들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도망치지 않는 그 태도는 묘한 평온함을 품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풍경 속을 떠돌았다. 낯설지만 따뜻한 이 세계를, 천천히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며.
이민 첫날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앞으로의 시간 속에도, 이처럼 작고 조용한 기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