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한국 영화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영화계의 '죽음'은 상업적 블록버스터의 실패인 것이지, 영화의 죽음은 아니다. 오히려 2023년의 영화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문제적이었고, 다채로웠다. 올해 『영화평론』 35호는 영화의 죽음이 아닌 영화의 재탄생에 주목하며 지면을 마련했다.
영평이 주목한 올해의 한국영화 5편과 관련해, 정재형 평론가는 이원형 감독의 〈희망의 요소〉를 꼽았고, 윤필립 평론가는 이원석 감독의 〈킬링 로맨스〉, 정민아 평론가는 가성문 감독의 〈드림팰리스〉, 지승학 평론가는 이지은 감독의 〈비밀의 언덕〉, 강선형 평론가는 홍상수 감독의 〈물 안에서〉에 애정 어린 시선을 주었다. 특히 저예산 독립영화인 〈드림팰리스〉의 경우, 공교롭게도 블록버스터급 영화인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함께, 아파트라는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아파트가 갖는 자본주의 괴물성을 리얼리즘적으로 예리하게 잘 다루었다는 게 정평론가의 진단이다.
나아가 이번 『영화평론』 35호에서는 황영미 평론가와 전찬일 평론가가 직접 프랑스 칸에서 보고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칸이 주목한 영화들을 소개하고, 한국영화계의 과제를 제시했다. 이번 76회 칸 국제영화에는 한국 영화가 경쟁부문에 지출하지 못했지만, 비경쟁부문에서 초청된 〈거미집〉, 〈잠〉,〈화란〉, 〈탈출: 프로젝트사일런스〉 등의 영화들에 대한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거의 해마다 칸을 방문하는 '칸의 전문 평론가' 전찬일 평론가는 한국 영화들에 칸의 관심을 열거한 뒤, “국내에서 바야흐로 외면키 힘든 '위기론'이 영화계를 뒤덮고 있지만, K-무비를 비롯한 K-콘텐츠를 향한 칸에서의 관심과 애정은 여전히 뜨거웠다”며, “작금의 위기론은 영화를 그저 돈벌이로만 치부하는 관성에서 비롯된 상업적 비관론이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탈리아 우디네에서 열리는 '우디네 극동영화제'를 다녀온 윤성은 평론가는 “북미 관객들을 포복절도시킨 〈바비〉의 유머코드가 한국 관객들에게 외면받은 것처럼, 이와 형식적, 주제적 측면에서 유사점이 발견되는 〈킬링 로맨스〉 역시 외국에서 인가를 더 얻은 작품으로 남게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신인 감독의 발견을 기록하는 「신인의 발견」에서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만든 김세인 감독이 주목받았다. 김희경의 평론에 따르면 이 영화가 김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신인감독의 작품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인물들의 심리를 세밀하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즉, 이 영화는 제목-인물의 심리 묘사-신인감독으로서의 역량과 가능성이라는 3박자를 골고루 갖춘 작품이라는 것이다.
올해의 〈신인평론상〉은 '영화속 식인과 살인을 둘러싼 까니발리즘적 욕망에 대하여-〈로우(Raw)〉와 〈본즈 앤 올(Bones and All)〉을 중심으로'라는 장편, '〈물안에서〉가 암시하는 관객의 (그리고 영화의)운명에 대하여'라는 단평을 제출한 김윤진씨와, 장평 '정주리 감독론: 찰나의 생성시대', 단평 〈범죄도시3: '마석도'가 되려는 마동석 vs 마석도가 '되려는' 마동석〉를 제출한 송상호씨에게 돌아갔다.
이어 평론가들의 리뷰 편에서는 국내외의 주목할 만한 영화 6편이 소개되었다. 국내영화로는 곽영진 평론가의 〈밀수〉, 송영애 평론가의 〈더문〉, 박유희 평론가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수향 평론가의 〈비닐하우스〉, 강익모 평론가의 〈사랑의 고고학〉, 박태식 평론가의 〈탄생〉이 게재되었고, 국외영화로는 조혜정 평론가의 〈스즈메의 문단속〉, 정민아 평론가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안숭범 평론가의 〈더 웨일〉, 윤필립 평론가의 〈바빌론〉, 이동준 평론가의 〈파멜만스〉, 이현재 평론가의 〈아바타:물의 길〉이 소개되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매년 선정하는 '영화 10선'이 2023년의 영화계를 가늠하는 결산물로서 게재되었다. 올해 '영평 10선'은 인상적인 데뷔작이 고루 포진해 있다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코로나 19와 함께 영화계도 오랜 몸살을 앓았지만, 곳곳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감독들이 반짝이는 영화를 들고 등장했다는 사실이 위안과 기쁨을 전해준다.
영화계가 그 어느때보다도 (상업적으로) 길고 깊은 침체의 늪에 빠진 상황에서 『영화평론』지에 게재된 주옥같은 글들이 많은 영화인들에게 지적 영감과 창의적 상상력의 기반이 되고, 참고문헌이 되어주길 바란다. 바쁜 와중에도 성실하게 원고를 보내주신 모든 필자 분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