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이전에, 비사고가 작동한다”
인간의 의식부터 식물의 생리까지,
교통 시스템부터 전투 드론 그리고 주식 알고리즘까지
모든 생물과 기계를 움직이는 숨은 힘을 파헤치다
오래된 질문이 있다. 기계도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내 질의에 대답하고 심지어 공감과 위로까지 건네는 지금, 질문은 근본적으로 뒤집힌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만 사고할 수 있다고 당연시해 왔을까?
캐서린 헤일스는 ‘인간 대 기계’라는 이분법을 넘어 그 둘의 뒤얽힘과 공진화를 사유해 온 세계적 포스트휴머니즘 이론가다. 이 책 ≪비사고, 인지적 비의식의 힘≫은 그 사유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업으로, 사고에 대한 인간중심적 관점을 벗어나 인간의 의식과 기계의 작동을 아울러 사유할 수 있는 통합적 틀을 제시한다. 이때 핵심이 되는 키워드가 비의식적 인지(nonconscious cognitive)다.
비의식적 인지는 인간이 의식(consciousness) 수준에서 파악할 수 없는 뉴런 프로세싱 수준에서 작동하지만 의식에 없어서는 안 될 기능을 수행한다. 비의식적 인지는 정보를 의식보다 훨씬 더 빨리 처리하고, 의식이 식별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미묘한 패턴들을 인식하고, 행동에 영향을 주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추론을 끌어내는 기능을 한다. 무엇보다 비의식적 인지는 반응이 느리고 처리 능력이 제한된 의식이 1000분의 1초마다 뇌로 흘러드는 내·외부의 정보 홍수에 압도되지 않도록 해 주는 중요 기능을 담당한다.
인공지능을 위시한 지능형 기계의 작동은 흔히 인간 의식의 작동과 비교되고는 하지만, 헤일스에 따르면 비의식적 인지의 프로세스와 훨씬 더 유사하다. 지능형 기계 또한 인간의 의식보다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고, 패턴을 식별하며, 추론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들 기계는 너무나 크고 복잡하고 다면적이어서 인간 뇌가 절대 처리할 수 없을 방대한 정보 흐름에 인간 의식이 압도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헤일스가 이 책에서 비의식적 인지에 천착하는 까닭은 단순히 그간 인간의 특징으로 여겨지던 의식적 사고를 평가절하하려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의 인지를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의 인지 그리고 기술적 시스템의 인지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비의식적 인지 개념을 단초로 삼아,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하는 인지 생태계(cognitive ecologies)에 대한 더욱 균형 잡히고 정확한 견해에 도달하는 것이 헤일스의 목적이다. 실제로 헤일스는 주변 환경에 반응하고 다른 개체들과 소통하는 식물의 사례를 들어 식물 또한 인지 능력을 바탕으로 주변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적응·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울러 인공지능과 드론 등 기술적 인공물들 또한 인지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이 나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음을 짚는다. 이처럼 인간만이 지구에서 중요한 혹은 유의미한 인지자(cognizer)라는 (오)인식을 넘어서면 수많은 새로운 질문, 문제, 윤리적 고려 사항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헤일스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정보를 의미 있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분산된 인지적 네트워크를 인지적 비의식(cognitive nonconscious) 혹은 인지 집합체(cognitive assemblage)로 정의하고,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커져 가고 있는 인지 집합체에 주목한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인지 집합체 사례는 교통 통제 시스템, 전투 드론, 주식 매매 알고리즘 등 다양하다. 이들 인지 집합체는 기술 발전으로 연결성이 강화되고 인간의 행위성이 점점 더 제한받게 되는 현실을 보여 준다. 예컨대 헤일스가 분석한 2010년 주식 대폭락 사건은 인간이 인간의 반응 능력을 초월하는 기술적 인지자들의 행위를 통제하는 데 실패한 대표적 사례다. 기술적 인지와의 상호작용이 앞으로 더욱 늘어나면 통제 실패의 사례도 더 늘어날 것이다.
인간은 인지 집합체의 일부일 뿐, 기후 변화와 환경 재앙 등 인류세의 문제들이 보여 주듯 집합체를 통제할 힘이 없다. 그러나 헤일스는 우리가 전체 구조를 우리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거나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지금이야말로 인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바탕으로 삼아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까지, 모두를 위해 인지 집합체가 나아갈 방향을 성찰할 때라고 요청한다. 이 책은 인지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현재 상황을 이해하는 데 인지가 지닌 중요성에 대해 대화를 촉발하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살아 있는 존재와 비인간 타자들을 위해 더 지속 가능하고 오래가며 번성하는 환경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책은 2부 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비의식적 인지 개념을 다룬다. 1장은 의식/비의식과 물질적 프로세스의 관계를 논한다. 2장은 비의식적 인지와 관련된 과학 연구들을 요약하고, 이를 인지에 관한 현시대의 논의들과 관계 짓는다. 3장은 신유물론을 논의하고, 신유물론 기획들의 틀에 비의식적 인지가 포함되면 어떤 이점이 있는지 분석한다. 4장은 두 종의 현대 소설, 톰 매카시(Tom McCarthy)의 ≪찌꺼기(Remainder)≫(2007)와 피터 와츠(Peter Watts)의 ≪블라인드사이트(Blindsight)≫(2006)를 사례로 분석하면서 의식이 인간에게 주는 이득이 아니라 치르게 하는 대가에 대해 알아본다.
2부는 인간-기술 인지 집합체들의 전체적 효과를 다룬다. 5장은 교통통제센터부터 유인 드론과 자율 드론까지 대표적 사례를 통해 인간-기술 인지 집합체의 역학을 보여 준다. 6장은 자동 매매 알고리즘에 초점을 맞추어, 그 작동 속도가 인간 의사 결정의 시간 체제를 훨씬 초월하는 인지 집합체의 함의를 고찰한다. 더 나아가 이런 종류의 인지 집합체들이 미치는 영향, 특히 글로벌 경제를 불안정하게 하는 전체적 효과를 논한다. 7장은 콜슨 화이트헤드(Colson Whitehead)의 소설 ≪직관주의자(The Intuitionist)≫를 꼼꼼하게 독해하면서 인지 집합체의 윤리적 함의를 탐색한다. 8장은 인지 집합체의 유토피아적 잠재성을 설명하고, 이 논의를 디지털 인문학으로까지 확장해 이 디지털 인문학 또한 인지 집합체로 간주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나아가 여기서 제안된 비의식적 인지라는 틀이 어떻게 디지털 인문학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