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개요〉
추격기에서 탈추격기로,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개발국가론의 많은 설명들이 투입과 선택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 책은 제도와 시스템, 즉 구조적인 성장과 변화에 주목한다. 한국의 성장은 투입된 자본과 노동의 양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저자들은 조직과 제도의 형성과 변화가 일어나는 동학을 이해함으로써 한국적 성장의 경로와 특성을 가늠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은 그러한 한국적 성장 구조를 보여줄 핵심 사례로서 과학기술 부문을 살피며, 그 연구 소재로서 과학기술정책을 다룬다.
한국 경제의 성장 경로는 크게 추격과 탈추격으로 나뉜다. 과학기술은 추격과 탈추격의 변화 경로에 가장 민감하고 빠르게 조응하는 분야기 때문에, 그 변화의 동학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다. 추격기는 한국이 개발도상국가의 경로에 진입하여 빠른 경제개발을 추진했던 20세기 후반으로, 탈추격기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선진 궤도에 오른 이후 추격형 성장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부상하는 2000년대 이후로 구분된다.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은 항상 어려운 문제를 대면하면서 진화해왔다. 과학기술기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외국의 과학기술과 정책을 효과적으로 모방하고 개선하는 혁신활동과 정책이 실행 가능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때까지 이론적으로는 많이 논의되었지만 어느 나라도 시도하지 않았던 길을 간 것이다. 결국은 성공해서 추격전략의 모범 사례가 되었다. 또 추격을 완성한 후에는 추격과 모방전략을 넘어서는 새로운 탈추격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이 성공해서 추격을 넘어 추월로 갈지, 아니면 실패하여 추락으로 갈지는 미지수다. 탈추격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것도 난제이다. 만약 이것이 성공한다면 이것도 추격의 함정을 벗어나는 모범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책의 구성〉
이 책 저자들은 한국 경제의 성장 경로가 크게 추격과 탈추격으로 나뉜다고 전제한다. 과학기술은 추격과 탈추격의 변화 경로에 가장 민감하고 빠르게 조응하는 분야기 때문에, 그 변화의 동학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다. 1부의 추격기는 한국이 개발도상국가의 경로에 진입하여 빠른 경제개발을 추진했던 20세기 후반으로, 2부의 탈추격기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선진 궤도에 오른 이후 추격형 성장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부상하는 2000년대 이후로 구분된다. 제1부 추격기는 홍성주가, 제2부 탈추격기는 송위진이 집필했다.
한국 과학기술정책의 역사를 추격기와 탈추격기로 나누어 고찰함으로써, 이 책은 각 시기의 과학기술정책을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추격기는 강력한 과학기술 국가주의, 정부주도의 5개년 계획과 그 실행, 산업 형성을 위한 인력 수급과 연구개발의 동원이 그 특징으로 나타난다. 추격기의 주인공은 테크노크라트이며, 이들의 과학기술정책 기획 능력과 시스템 구축을 위한 자원 동원 능력이 핵심적인 성장 동인이었다. 그에 비해 탈추격기에는 민간의 혁신 주도성, 시민 참여와 같은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과학기술정책에서도 기초연구 강화, 프론티어 연구개발 등 지식으로서의 과학기술 발전을 추구하고, 사회와 공공영역에 대한 기여를 중시하는 기조가 강화되었다. 탈추격 시기의 주인공은 전문가이며, 과학기술정책에서 이해당사자의 참여와 조정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에 따라 과학기술 분야의 성장이 결정된다. 결국 추격기의 과학기술정책은 정부의 소수 테크로크라트가 주도하는 수단이었다면, 탈추격기의 과학기술정책은 민간의 전문가들과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민관 협치의 도구라고 볼 수 있다.
저자들은 20세기 후반 추격기를 단순히 탈추격을 위해 청산해야 할 과거 시기 정도로 간주하지 않는다. 최근 한국에서 출판된 많은 보고서와 미디어 기사에서는 마치 추격기의 발전에 대해 손쉬운 것이었던 듯 취급하나, 실제의 역사적 과정은 그렇지 않았다. 추격기에 대한 고찰은 첫째,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규명하기 위해 중요하고, 둘째, 무엇보다 현재의 구조적 특성과 문제를 이해할 결정적 단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더욱이 추격이 불가능하던 시점에서 추격의 경로로 진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의 경제성장은 다른 개발도상국가에게 모범 사례로 꼽힌다. 이 책의 추격기 서술은, 기존에 추격기를 이해하던 통념과 달리, 한국적 성장 모델에 대한 심화된 이해와 시사점을 제공할 것으로 생각한다.
추격으로부터 탈추격으로 이행하는 경로는 불연속적인 구조 변동을 수반하는 과정이다. 탈추격은 압축성장이 일어난 20세기 후반의 성장 방식에 대한 성찰로부터 제기되며, 기존의 제도와 방식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의 형성과 실천을 변화의 동력으로 삼는다. 또한 탈추격은 기존의 역사적 궤적으로부터의 단순한 이별이 아닌,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전환이기 때문에 추격형 시대의 관행과 공존하기도 한다. 즉, 탈추격은 현재로서는 그 끝이 언제이고 어디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진행형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한국은 2016년 현재 탈추격으로의 이행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때로는 탈추격을 향해 진일보하다가도, 때로는 추격형 방식으로 후퇴하는 시행착오를 동시에 겪고 있는 것이다.
추격과 탈추격의 시대를 이끌고 만들어가는 측면에서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은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정책 기획과 실행의 사례다. 많은 나라에서 과학기술정책을 포함한 여러 정책 기획이 실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슬로건에 그친다. 이 책에서 다룰 한국 과학기술정책의 사례는 경제사회적 발전 단계별로 필요한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정책이 어떻게 기획되고 실천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보다 넓은 틀에서 보자면, 변화에 대한 한국의 높은 수용력과 적응력을 보여준다. 요컨대, 추격기에서 탈추격기로 이행하는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은 경제사회적 변화에 반응하고 대응하는 한국적 동학의 핵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