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만 팔로워가 주목해온 트위터리안 쑨디의
하이퍼-리얼리즘 ‘오타쿠’ 보고서
“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겠지.
그것이 바로 오타쿠의 삶이니까.”
◎ 도서 소개
무언가를 온전히 사랑하는 일의 무한한 기쁨
‘덕질’을 향한 쑨디의 러브레터
정량 초과의 팬심을 140자 틀 안에 꾹꾹 눌러 담아온 쑨디가 오타쿠 문화와 내부 역학에 관해 작정하고 무려 14만 자로 풀어냈다. 16만 팔로워를 웃기고 공감케 하는 입담에 매료되어 그의 ‘썰’을 기다려온 이들에겐 반가운 소식일 터. ‘시위 응원봉’을 향한 주목 한 번으로는 갈음할 수 없는 ‘팬’ 문화. 철없고 가벼운 존재로 비가시화되어온 팬 · 오타쿠의 정체를 쑨디와 함께 살펴보자. 16만 개에 육박하는 트윗을 관통하는 그 순정의 역사가 펼쳐진다.
‘너무 오래 오타쿠로 살아서’ 쑨디는 열변을 토한다. 오타쿠를 향한 세간의 편견에 대해. 누군가 쑨디에게 “현생을 살아, 오타쿠야!”라고 힐난한다면 그는 되물을 것이다. “이게 제 현생인걸요?” 쑨디는 오타쿠로서의 삶이 단순치 않고 순탄치도 않음을 밝히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질을 멈추지 못하는 즐거움에 대해 풀어낸다. 방송국 앞 ‘빠순이’의 이미지로, 컴퓨터 앞 ‘덕후’의 이미지로 납작하게 묘사되는 오타쿠의 오해를 풀고 오늘날 ‘양지’로 올라온 오타쿠의 다양성과 영향력, 가치를 소개한다.
또한, ‘너무 오래 오타쿠로 살아서’ 쑨디는 비판하고 자조한다. 입덕과 탈덕, 맹신과 배신, 0부터 100까지 차고 기우는 팬심을 경험한 당사자로서 팬 문화와 일정 거리를 둘 수 있게 된 쑨디는, 로맨스와 미스터리, 휴먼드라마 등이 전부 담긴 복합 장르로서의 덕질에 대해 고찰해낸다. 팬덤 문화와 세대론, 엔터 산업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는다.
온라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쑨디. 하지만 그의 글에는 환멸이나 냉소의 기색을 찾기 힘들다. 1분이면 여론이 바뀌는 소셜미디어 환경 속에서 그토록 다양한 장르를 포식해 왔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 생활이 ‘즐겁다’고 고백한다. 이 모든 일을 통해 결국 ‘쑨디’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타쿠로서의 여정은 결국 ‘나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무엇이든 소비되고 휘발되는 현대사회, 응원봉 이상으로 반짝이는 오타쿠의 멋스러움을 함께 발견해보자.
◎ 본문 중에서
팬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존중’일 것이다. (…) 애정을 기반으로 한 특이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감정이 단순 소비 심리로 치부되는 것만큼 불편한 일도 없을 것이다. 솔직히 지금까지 돌려 말하느라 이제야 밝히는 사실이지만 제정신이면 그 가격 주고는 절대 안 살 물건들을 판매하면 이 정도는 좀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디 달고 다니지도 못할 아크릴 키링을 2만 원에 판다든지 하는 소비자 기만행위 말이다)
【70쪽_팬의 마음 설명서】
[논란에 의한 ‘탈덕’의] 고통은 실제 이별의 고통과 매우 유사하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좋았던 기억들, 습관적으로 찾게 되는 관련 콘텐츠들, 그 사람의 생년월일로 지정해뒀던 비밀번호. 이런 경험들은 마치 유령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며 상처를 덧나게 만든다. 이 단계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기억의 오염이다. 순수하게 좋았던 기억들이 의심과 배신감으로 물들어버리는 경험.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느꼈던 위로와 감동이, 이제는 불편함과 아이러니로 가득한 경험으로 변질되는 것. ‘기억의 재구성’ 과정은 종종 우리 정체성의 일부까지 뒤흔든다.
【112쪽_좋아했던 걸 쪽팔리게 만드는 녀석은 죽어야 한다】
내 오타쿠 정체성에 대한 나 자신의 태도 또한 변했다. 청소년기에는 종종 숨기거나 방어적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 있게 이를 인정하고 심지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덕질을 통해 얻은 모든 경험과 성장 그리고 만남은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오타쿠로서의 여정은 결국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주류와 다른 취향을 가지고 때로는 깊이 빠져들고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 그것이 바로 내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142쪽_쑨디의 덕질 일대기】
문제는 이런 완벽함의 추구가 우리에게서 시도할 용기를 빼앗아간다는 점이다. 누구나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시행착오를 거치고 때로는 창피를 당하면서 우리는 성장한다. 하지만 완벽함만을 요구하는 사회에 서는 이런 과정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완벽해야 하고 그러지 못한다면 시도조차 말아야 한다는 압박이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AI가 만들어내는 완벽한 결과물은 우리에게 일종의 강박을 심어준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기준을.
【169쪽_완벽한 AI보다는 구린 진짜가 좋아】
나는 여전히 소셜미디어가 좋다. 그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접할 수 있었던 다양한 생각, 기록으로 남은 나의 흔적. 이 모든 것이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앞으로도 나는 ‘소셜미디어 인간’으로 남을 것 같다. 다만 조금 더 의식적으로, 더 따뜻하게 이 공간을 사용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소셜미디어에서 받은 것들에 대한 작은 보답이 아닐까. 사람들이 모두 가장 다정한 우주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217쪽_내가 소셜미디어를 사랑하는 N가지 이유】
우리는 왜 그토록 쉽게 타인의 진심을 ‘결핍’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려 할까. 이는 현대 사회 특유의 시선일지 모른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정의하고 원인을 찾으려는 강박적인 태도. 누군가의 순수한 열정이나 깊은 애정을 굳이 결핍이라는 틀에 가두려는 시도는, 오히려 우리 사회의 결핍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특히 이런 시선은 팬덤 문화를 바라볼 때 더욱 두드러진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은 현실에서 채우지 못한 무언가의 결과물이라거나, 게임에 빠지는 것은 현실 도피라는 식의 해석이 그렇다.
【220쪽_“네 안의 결핍을 인정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