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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탄력을 잃어가고 기억력도 시력도 쇠해가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조금씩 자신의 몸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신체 조정력이 떨어져 음식을 먹다가 자주 흘리기도 하고,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만 따갑게 느껴진다. 몸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들조차 이제는 늙음의 증거이고, 더 나아가 언젠가 맞닥뜨릴 죽음을 예고하는 불길한 신호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산다는 것은 희망찬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지만, 다른 방향에서 보면 매일 조금씩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은 그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품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존재인 동시에,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알려주는 신호장치인 셈이다. 암 치료를 받고 나온 경선에게 어느 날 이혼한 전남편이 남긴 큰돈이 들어온다. 경선은 동갑이지만 언니인 안나, 똘똘한 외손자 다니엘과 함께 자신의 행복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멋진 고성을 향해 해외여행을 떠난다.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여러 사정에 묶여 살아온 세 사람에게는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일탈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죽음을 가까이에서 느껴본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모험을 감행한다. 이 소설에서 특히 마음에 남은 것은 ‘첫’에 대한 이야기였다. 모든 것의 ‘첫’ 기억은 결국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낡았다는 뜻만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시간과 경험이 축적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여기까지 온 늙은 몸 역시 함부로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몸은 기쁨과 고통, 욕망과 상실, 사랑과 후회를 차곡차곡 품고 온 우리 삶의 가장 오래된 기록물이다. 그래서 몸이 고장 났다고,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해서 아직 경험하지 않은 삶의 ‘첫’들을 외면하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삶을 미리 포기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늙음의 반대편에 젊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멈추는 마음의 반대편에 시작하는 마음이 있는 것 아닐까. 시작할 수 있는 마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궁금해하는 마음이 바로 생명력이고 젊음일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은 매 순간이 ‘첫’이다.” ‘첫’은 지나간 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첫사랑, 첫 여행, 첫 성공처럼 젊은 날에 이미 대부분 소진해버리는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한 내 앞에는 경험해보지 않은 시간이 계속 도착한다. 그러니 ‘첫’은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이고 ‘우리의 다음’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의 순간조차 마냥 두려워할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그것은 생애 단 한 번뿐인 ‘첫 죽음’일 테니까. 삶과 죽음이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 위에서 함께 흘러간다는 소설의 시선이 이 지점에서 묘하게 따뜻해진다. 나이 든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혹시 기운 빠지고 쓸쓸한 소설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은희경 작가 특유의 시니컬함도, 사람을 슬쩍 비틀어 바라보는 유머도 여전히 살아 있어서 좋았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농담하는 마음으로” 썼으며 과거는 담백하되 신랄하게, 미래는 얼마쯤 담대하고 활달하게 바라보려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는 늙어가는 몸을 위로하거나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태도보다는, 그 몸을 데리고도 한번 더 살아보자는 기세가 있다. 몸이 늙었다고 삶까지 늙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무언가를 처음 해볼 수 있다. 늙음이란 ‘첫’이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라, 어쩌면 수많은 ‘첫’을 품은 채 또 다른 ‘첫’을 향해 가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늙는다는 일이 조금 덜 쓸쓸해진다. ________ 한 사람의 몸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들어 있다. 몸은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 마지막 삶이 거처할 최후의 집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재로 사라진다. 개체의 시간을 끝내고 무한에 섞여드는 여정이다. 시간의 감촉 | 은희경 저 #시간의감촉 #은희경 #문학동네
오랜만에 만난 그 시절 그 문체. 나이 들어가는 게 이 순간만큼은 외롭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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