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 곳곳에서 길게는 100년 이상 보전된 토종 농산물 602점을 재배하는 농가 242곳 가운데, 병충해에도 강하고 지역민들의 입맛에도 맞는 채소와 잡곡, 과실 씨앗을 지킨 농가 19곳을 심층 인터뷰한 책이다.
급속히 사라지는 토종 농산물을 지키고 알리려는 (재)화성푸드통합지원센터는 씨앗을 받아서 농사짓는 화성 농민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으는 이 책을 기획했다.
전국의 농가를 찾아다니며 토종 씨앗을 수집하고 보급하는 비영리단체 ‘토종씨드림’의 대표 활동가이자, 전남 곡성군에서 농사짓는 농부 변현단이 2018년 봄부터 여름까지 농가를 다시 찾아가 인터뷰하고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오래된 씨앗의 현재와 지혜로운 농부의 삶을
생생한 인터뷰로 담다
지역 소비자들이 다양한 맛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역 특색을 살린 먹거리 유통을 주도하는 (재)화성푸드통합지원센터는 지난 2016년부터 2017년까지 토종 씨앗을 수집, 보급하는 비영리단체 ‘토종씨드림’ 과 함께 화성 지역에서 토종 채소와 잡곡, 과실 등 270개 품종의 씨앗 602점을 수집했다. 그리고 2018년 봄부터 여름까지 열아홉 농가를 다시 찾아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기록을 책으로 묶었다. 인터뷰와 기록은 토종 농사꾼 변현단이 맡았다.
1~2년 만에 다시 찾은 농가의 절반은 80대를 넘어선 분들이었고, 그분들이 보전한 씨앗 품종도 수집 당시보다 현저히 줄어 있었다. 농사가 힘들어서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종자를 없애 버려서다. 연세가 연로한 농가일수록 토종 씨앗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씨앗만이 아니라 농사지으며 살던 삶의 지혜들도 씨앗과 함께 사라지는 안타까운 현실을 생생하게 마주하는 현장이기도 했다.
왜 토종 씨앗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농사지어 왔을까?
왜 토종 씨앗을 포기하게 됐을까?
지은이는 토종 씨앗이 왜 중요한 지가 아니라 ‘왜 토종 씨앗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농사를 지어왔는지’, 반면에 ‘왜 토종 씨앗을 포기했는지’가 드러날 수 있도록 인터뷰했다고 밝힌다. 대도시 근교농업이 가능한 화성은 시장이 요구하는 단일작물, 단일품종에 의한 상업농이 용이한 지역이기도 했지만, 토종 씨앗을 포기한 것은 농가의 의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비자들이 그다지 토종 농산물을 선호하지 않아서 오히려 농가가 토종 씨앗을 포기하고 F1종자(서로 다른 품종을 조합한 잡종 1세대 씨앗)를 선택하는 경우가 그렇다. 생계를 잇기 위해 생산한 농산물을 소비자가 찾지 않는다면 그 씨앗은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또 마을회관에서 누군가로부터 권유 받은 ‘보급종’을 생산한 농산물들이 농협이나 유통사로 팔려나가는 것도 토종 씨앗이 자연스럽게 밀려난 이유였다.
씨앗을 사서 짓는 요즘 농업과 달리 육이오 전쟁 이전만 해도 농가에서는 좋은 씨앗을 받으면 이웃과 나누고 품앗이도 했다. 씨앗을 물려받은 연로한 농부들은 자식에게 대물림할 씨앗을 지키며 살았지만, 요즘 농촌에는 가족도 마을 공동체도 사라지고 있다. 씨앗을 대물림 할 자식도, 함께 농사짓는 공동체도 사라지는 현상 역시 토종 씨앗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든 것이다.
반면, 지금껏 한두 가지라도 토종 씨앗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개량종보다 더 좋은 맛과 한평생 먹어왔던 풍속, 그리고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다행스럽게도 여기에 지자체의 토종 씨앗 보전 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 화성시 로컬푸드(그 지역에서 생산되고 그 지역에서 소비되는 먹거리) 봉담 직매장에서 소비자들에게 홍보하고 판매하는 토종 농산물들 덕에 적으나마 수입을 올리는 농가들도 있었다.
달갓, 갓무, 께묵… 화성에만 있는 품종과 음식 문화
지자체가 대물림해 보전하고 보급해야 하는 이유
다른 지역들처럼 화성시 역시 토종 씨앗이 처한 현실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사를 통해 화성 고유의 토종 작물을 만나는 행운도 있었다. ‘달갓, 갓무’와 같은 것이다. ‘달갓’은 화성에서 만들어진 품종으로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서 생긴 이름을 가진 갓을 말한다. ‘갓무’는 염전이 많았던 화성에서 염전 사람들이 즐겨 먹었던 별미 김치인데, 두 농가에서 이어져 왔다.
책에서는 작물과 품종이 겹치지 않도록 인터뷰한 내용을 기록했고, 농가에서 해먹던 전통적인 요리법에 대해서도 빼지 않고 다소 거칠게라도 기록했다. 또한 어르신들의 생애도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한두 분은 곧 농사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지만, 그들이 남긴 토종 씨앗은 화성푸드통합지원센터를 통해 계속 보전될 수 있게 되었다. 환한 얼굴로 이제는 남은 평생 동안 마음 편히 토종 농사를 이어가겠노라는 연로한 농부들의 인터뷰는 읽는 내낸 가슴 뭉클하고 숙연하게 만든다.
2018년 여름, 화성시 로컬푸드 봉담직매장에서는 사과참외가 히트 상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봄부터 유채, 뿔시금치, 개세바닥상추, 곰보배추, 게걸무, 구억배추, 황파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10월부터는 ‘끼묵(께묵)’이라는 화성의 토종 채소가 겨울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소비자들을 기다릴 것이다. 지은이들은 소비자들이 먹거리뿐만 아니라 이 오래된 씨앗과 지혜로운 농부의 삶까지도 가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