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서로 너무나 이질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일상과 마법을 하나의 공간 안에 화해롭게 일치시키고 있다. 잔인한 현실은 언제나 신비가 흘러들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일상은 투명한 유리 구슬 속에 발가벗겨져 전시되어 있다. 그러한 일상 속에 감동이란 없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과 그것에 발맞추는 현실의 법칙만이 있을 뿐이다. 마법은 다른 세계에 속할 뿐이고 더 이상의 현실과의 접촉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는 일상을 거스르며 현실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마법의 실체를 현실의 문법 속에 풀어놓으며 뒤섞는다.
소설은 "진정한 마법은 기억"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덧붙여 나는 기억은 시이며 동화이고, 현실과 마법의 진정한 만남은 소설에서 완성된다는 이 소설의 숨은 메시지를 읽어낸다. 복거일의 절제되어 있는 단정한 문체는 언뜻 보기에, 전율하고, 메아리치고, 과장되고, 둥둥 떠다니며 신비한 베일에 둘러싸인 마법의 표현에는 적절치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가장 단단한 것이 가장 부드러운 것에 함몰되듯이, 마법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는 그보다 더 적절한 문체가 없을 듯하다. 보라, 정제되고 간결한 문장 안에 마법의 힘이 꿈틀거리고, 겸손하고 머뭇거리는 주인공 "도린"의 세월에 마법이 끼어든다. - 김병익(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이 작품은 시간의 압제에 맞서는 사내의 이야기다. 그가 시간에 맞서는 곳은 헤어진 연인과 다시 만나는 자리고, 맞서는 방식은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자신에게 했던 다짐을 되살리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시간의 손길이 특히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지난 일들에 대한 평가에서다.
일단 지난 일이 되면, 어떤 일이든 현재와의 관련 속에서만 뜻과 가치를 지니게 된다. 당시의 생각과 희망과 다짐은 별다른 뜻을 지니지 못한다. 그런 사정은 생존에 유리하겠지만, 사람처럼 긴 기억을 지닌 존재에겐 어쩔 수 없이 아쉽고 곤혹스럽다. 문득 초라해지고 뒤틀린 모습이 되어 한구석으로 물러난 지난 일들을 떠올리면, 우리는 그것들에게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시간의 압제에 맞서는 자신의 모습을 꿈꾼다. 그리고 기회가 올 때마다, 시간에 맞서 일어선다. 현실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신의를 지키는 사람들은 전형적이다. 당연히,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칭찬하고 응원한다. 그러나 그런 신의가 옛사랑에 관한 것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것은 언뜻 보기보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아마도 사회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과 경제학의 성과들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시간은 가장 압제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로선 그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인류 사회의 차원에서 시간은 흔히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짧은 목숨을 지닌 개인의 차원에서와는 달리, 거기에선 시간은 그렇게 압제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몇 해 전에 세계일보에 연재됐는데, 당시엔 매춘을 서비스 산업으로 바라보고 "거리의 여인들"을 기업가들로 대우하자는 주장은 아주 급진적이었다. 이제 그런 주장은 앞선 사회들에선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졌고 몇몇 사회들에선 제도들로 구체화됐다. 작품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길게 펴는 일은 모든 작가들이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아쉽게도, 위험을 잘 안다는 것이 유혹을 억제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신문 연재 소설이라 가볍게 쓰겠다고 생각했던 작품에 내 주장들을 많이 넣어서, 작품은 매끄럽지 못하게 됐다. 연재하는 동안, 여러 분들의 도움을 입었다. 그분들께 깊은 고마움의 말씀을 드린다.
소설가로 시인으로 그리고 사회평론가로서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으며 활발한 활동을 보여온 우리 시대 대표적인 지식인 복거일의 새 장편소설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이 작품은 1996년 세계일보에 "마법의 성"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연재를 시작할 때, 복거일은 "신문 연재 소설은 독자들이 잠깐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읽을거리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저항하면서 독자들에게 화두가 될 만한 것들이 들어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밝히며, 골치 아픈 일상에서 잠시 도피해 머리를 식히는 이야기 방식을 거부했다.
독자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 복거일의 이 작품은 통념적인 신문 연재소설과는 다른 신선한 읽을거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시작되었다.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에서 복거일은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풀어야 할 "과거와 현재의 부딪침"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살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어느 사이엔가 소외 계층이 되어버린 나이 든 사람들이 맞는 현실의 모습을 그리는 한편 그런 소외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지나칠 경우, 그것에서 나오는 사회적 손실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이든 듬직하게 지니지 못하는 경향이 점점 뚜렷해지는 우리 사회에서 그 점은 기회가 올 때마다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지.
"과거와 현재의 부딪침"―"캐기 힘들고 비켜가고 싶은 "늙음"을 향한 접근이 작품은 시간의 압제에 맞서는 사내의 이야기다. 그가 시간에 맞서는 곳은 헤어진 연인과 다시 만나는 자리고, 맞서는 방식은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자신에게 했던 다짐을 되살리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시간의 손길이 특히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지난 일들에 대한 평가에서다. 일단 지난 일이 되면, 어떤 일이든 현재와의 관련 속에서만 뜻과 가치를 지니게 된다. 당시의 생각과 희망과 다짐은 별다른 뜻을 지니지 못한다. 그런 사정은 생존에 유리하겠지만, 사람처럼 긴 기억을 지닌 존재에겐 어쩔 수 없이 아쉽고 곤혹스럽다.
문득 초라해지고 뒤틀린 모습이 되어 한구석으로 물러난 지난 일들을 떠올리면, 우리는 그것들에게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시간의 압제에 맞서는 자신의 모습을 꿈꾼다. 그리고 기회가 올 때마다, 시간에 맞서 일어선다. 현실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신의를 지키는 사람들은 전형적이다.
당연히,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창찬하고 응원한다. 그러나 그런 신의가 옛사랑에 관한 것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것은 언뜻 보기보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아마도 사회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과 경제학의 성과들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시간은 가장 압제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로선 그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주인공 도린은 50대 초반의 시인이자 영문학을 전공한 지식인이다. 그는 한참 일할 나이에 직장에서 퇴직한 실업자로 요즘 세태를 반영한 인물이다. 이른바 "조기 퇴직자"의 시각으로 본 세상 풍경이 이 소설의 한 줄기인 셈이다. 이 틀 속에 최근의 예민한 사회적 이슈들도 작가 특유의 시각으로 걸러져 정교하게 삼투된다.
이와 더불어 주인공은 젊은 시절에 결혼하려 했다 실패한 한 여인과의 재회를 향해 움직여 나간다. 바로 이 여인과의 재회를 향한 2주일 동안의 갖가지 사념과 에피소드들이 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양념이기도 하다.여기에 "늙음"에 대한 간단치 않은 성찰이 살을 이룬다.
작가는 "늙음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한 글들은 많았지만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분석한 문학은 없었다"며 "늙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세포가 죽어간다는 것 아닌가"라고 일견 단순하게 말한다. 그러나 "늙는다는 일"과 "세포의 노쇠"를 연결함으로써 파생되는 관념적인 이야깃거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작가는 소설 초두에 “젊음은 주어진다; 늙음은 이루어진다. 늙기 위해선 세월에 섞을 마법을 만들어내야 한다”라는 범상치 않은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늙는다는 것은 세월이 제조해내는 마법이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호기심을 부풀리는 작가의 이러한 구상은 그러나 사변적으로 지루하게 전개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환상적인 동화세계의 아름다움과 딸과 옛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서정의 한 자락으로 녹아들면서 독자들에게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는 일상을 거스르며 현실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마법의 실체를 현실의 문법 속에 풀어놓으며 뒤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