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아본 사람처럼 즐기는 타이베이 인문답사기 《타이베이 소박하고 느긋한 행복의 도시》가 도서출판리수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대만의 수도인 타이베이를 단순히 먹고 즐기는 여행지가 아닌 그들의 역사·문화·정신을 통해, 겉이 아닌 속으로부터 출발하는 인문답사를 제시한다. 이웃 나라 대만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는 물론 인문적인 여행의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1부에서는 타이베이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의 소박한 일상과 낡고 밋밋한 도시 정경을 통해 왜 타이베이는 겉모습보다 내실을 추구하게 되었는지 전한다. 2부에서는 국립고궁박물원으로 안내한다. 대표 유물들의 감상 포인트와 내력을 전함으로써, 5000년 중화 문명을 만나기 위해 왜 사람들은 베이징이 아닌 타이베이로 향하는지를 실감케 한다. 3부에서는 대만 현대사의 대표적인 현장으로 안내하여 대만인의 정체성과 문화적 특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풀어내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 이념 차이로 인한 분단, 그리고 본성인과 외성인과의 갈등 등으로 형성된 타이베이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마지막 4부에서는 여행자의 시선이 아닌 타이베이 사람처럼 즐기는 타이베이를 전한다. 여타의 여행 가이드 또는 여행 에세이와 차별되는, 오래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깊이 있는 해설과 팁이 더해져, 의미 있는 여행을 꿈꾸는 이를 자극한다.
타이베이, 겉모습보다 내실인 이유
타이베이와 처음 마주하면 칙칙한 회색과 낡은 모양새에 실망하기 쉽다. 빌딩과 집들은 칠이 벗겨져 콘크리트 맨살이 드러나거나 이끼가 끼어 있고, 사람들의 모습도 수수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진다. 세계 25위권의 경제력에, 세계 4~5위 정도의 외환보유액을 가진 대만의 경제를 생각한다면 다소 언밸런스한 모습이지만, 이런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에게 대만은 임시거처에 지나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본토로 돌아가겠다는 염원을 품었기에 대만 정부는 도시의 인프라 조성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게다가 타이베이의 날씨도 한몫하여 사람들은 무더위와 잦은 태풍으로 훼손되는 외형에 개의치 않는다. 대만 사람들의 가치관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람이 생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를 한국에서는 ‘의식주(衣食住)’라고 표현하지만, 중화권 사람들은 ‘식의주(食衣住)’라 말한다. 체면보다는 실용을 우선시하는 사고방식이다. 타이베이가 회색빛을 띄는 근본에는 겉보다는 속을, 보이는 것보다는 내실을 중시하는 정신과 소박한 취향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이 속에서 소박하지만 밝은 타이베이 사람들은 여유를 즐긴다. 서울에서의 삶이 ‘프레스토’라면, 타이베이에서는 ‘라르고’다. 더운 지방 특유의 느릿함과 중화권 특유의 ‘만만디’ 문화의 변주곡인 셈이다.
왜 국립고궁박물원은 대만인의 자부심인가
타이베이를 찾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들르게 마련인 국립고궁박물원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상징물이다. ‘중국식 근대화의 상징’이고, ‘중화 문화 계승의 상징’이자 ‘분단의 상징’이다.
“국립고궁박물원을 다녀오지 않고서는 타이베이를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의 국보 중에서도 가장 가치 있는 작품 69만 점이 타이베이의 국립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5,000년 ‘중화 문명의 진수’를 보기 위해서는 베이징이 아닌 타이베이를 가야 한다. 이렇듯 국립고궁박물원은 비록 중국 본토는 내주었지만 ‘중화 문화의 계승자’임을 자부하는 거대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국립고궁박물원은 1949년 이후 분단된 양안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본래 베이징 고궁(자금성)의 유물 중 약 1/4은 대만으로 건너왔지만, 나머지 3/4은 본토에 남아 이산가족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중에는 작품 자체가 쪼개어져 한쪽은 중국에 다른 한쪽은 대만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회화전시실의 백미로 꼽히는 ‘부춘산거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원(元)대 화가 황공망(黃公望)의 대표작으로, 생전에 “자신이 죽거든 그림도 함께 태워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사후 불에 던져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카 오자문(吳子文)이 급히 불구덩이에서 꺼냈지만, 그림은 큰 부분과 작은 부분으로 분리되고 말았다. 이후 ‘잉산도권(剩山圖卷)’으로 불리는 51.4cm의 앞부분은 중국 항저우 저장성박물관에 남았고, ‘무용사권(無用師卷)’으로 불리는 639.9cm의 뒷부분은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전시되어 있다.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황실의 수공예품들, 현대 기술로도 100% 재현이 불가능한 하이테크 문명의 결정체인 도자기, 붓으로 세상을 움직인 당대 서예가의 작품들까지 국립고궁박물원의 유물 하나하나는 중화문명의 높은 예술성의 증거이다. 왜 국립고궁박물원이 대만사람들에게 ‘중화 문화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을 안겨주는지 실감할 수 있다.
슬픈 원주민의 역사와 대만현대사 최대의 트라우마
타이베이는 대만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도시이다. 특히 타이베이는 대만 역사의 중심지로 그 역사를 알고 보면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보아이특구에서 총통부 청사 앞으로 쭉 벋은 10차선의 길 이름은 케타갈란대로다. 이 이름은 대만 원주민인 케타갈란족에서 유래하였다. 한족이주기와 일제강점기, 중화민국의 대만 통치기에 걸쳐 대만 원주민의 역사는 지배자에 의한 착취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슬픈 원주민의 역사는 1930년에 발생한 ‘부샤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본인으로부터 미개인 취급과 차별·멸시에 대한 시디크족의 항거로 시작되었으나, 결국 700여 명이 사살당하고, 다른 부족에 의해 200명이 목숨을 잃은 말 그대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끝이 났다. 대만 원주민의 정체성과 문화는 새로운 지배자들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짓밟혀왔다. 민주화 이후 점차 권리가 일부 회복되고, 타이베이 시내 중심부의 도로 이름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지만, 대만 원주민의 역사는 슬프다.
오늘날 타이베이 도심에는 시민들의 쉼터로 자리잡은 2.28평화기념공원이 있다. 이 곳이 특별한 이유는 ‘대만 현대사 최대의 트라우마’인 2.28사건이 발생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이다. 2.28사건은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대만이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의 일부가 되면서 비롯되었다. 본성인(대만인)과 외성인 간의 문제로서 본성인의 입장에서는 통치자가 일본인에서 외성인으로 바뀌었을 뿐 더욱 큰 박탈감을 받아왔다. 본성인들 사이에서는 “일본 늑대가 가고, 중국 돼지가 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질 정도로 민심은 흉흉해지고, 정부에 대한 불만은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1947년 2월 27일 무허가 담배를 팔던 여인 린장마이에 대한 처벌에 대해 항의하던 한 시민이 경찰의 발포로 목숨을 잃으면서 본성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온건 대응을 발표했던 것과 달리 계엄군과 경찰의 무차별 진압 작전을 시행함으로 셀 수 없는 본성인이 죽고 다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 간 지속된 계엄령 하에서 2.28사건은 금기에 붙여졌다. 1988년 장징궈가 세상을 떠나고, 첫 본성인 출신 리덩후이가 총통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약 40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9년 허우샤오센 감독은 2.28사건을 다룬 영화 ‘비정성시’를 만들어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하였다.
대만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오늘의 대만을 이해하기 어렵다. 일제 식민지, 양안 관계,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 원주민의 슬픈 역사까지, 타이베이의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아픔을 공유한다면, 타이베이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다.
‘타이베이 사람’처럼 즐기는 타이베이
타이베이를 제대로 즐긴다 함은 단순히 보고, 듣고, 맛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에 저자는 타이베이 사람처럼 즐기는 타이베이를 소개한다. 여행자의 시선이 아닌 현지인의 동선으로 이끈다. 타이베이 사람들의 주말 풍경은 어떠하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는 어디이며, 현지인은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어디로 가는지 등등 오래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풍경과 이야기를 풀어낸다.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는 타이베이의 명동이라 일컬어지는 ‘시먼딩’에서는 대만 영화 이야기를, 올드타이베이를 만날 수 있는 ‘완화구’에서는 여행자를 100년 전으로 안내하여 색다른 멋을 경험하게 한다. 타이베이의 외곽인 ‘단수이’, ‘주펀’, ‘스펀’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그 역사와 숨어 있는 일화들도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또 세계 10대 커피 도시인 타이베이의 카페 스토리를 알고나면 타이베이에서의 커피 한 잔은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밖에도 타이베이의 대학가와 서점거리, 야시장, 소원을 비는 타이베이의 궁(宮) 이야기 등 타이베이를 보다 멋스럽고 풍부하게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