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실린 인물 모두와 일해 봤다. 아직 만들어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김우형 촬영감독과도 〈디 액스The Axe〉를 꽤 오래 준비했다. 다 친한 분들이란 얘기다. 그런데도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다. 어쩜 이럴까.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이건 너무하지 않나, 야속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생각해 보니, 그건 이 양반들이 내게 스스로를 감추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작업 얘기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 일중독자이기 때문이고, 과거보다는 현재가 절박한 프로페셔널이기 때문이었다. 사적인 이야기, 흘러간 옛 노래는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게 꼭 좋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아직도 자기 분야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을 수 있다는 소리다. 세계 최고 기량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 치러야 했던 비싼 대가의 내역이 여기 적혀 있다. 이들을 ‘예술가를 돕는 기술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이들은 예술가를 돕는 예술가다. 진정으로 예술가를 도울 수 있는 이는 예술가뿐이기 때문이다.” - 박찬욱 영화감독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온 이들을 만나다
한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잠식당하다시피 한 국내 극장가에는 한국 영화 르네상스가 펼쳐지고 있다. 관객들은 이제 더 이상 자국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나 탄탄한 시나리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매력 등에 사로잡혀 극장으로 향하고 있다. 레드 카펫을 수놓는 스타 배우와 감독들에게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고 관객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영화는 집단 예술이다. 많은 관객들은 영화를 볼 때 배우와 감독만을 기억하지만, 영화는 그 외에도 수십, 수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에 의해 완성된다. 그 중에서도 기술 스태프는 영화를 실제 스크린에 구현해내는 가장 전문적인 직종이지만, 그에 비해 가장 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 영화 장인』은 현재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일궈낸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여덟 명의 기술 스태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촬영, 조명, 편집, 사운드, 무술, 특수효과, 특수분장, 특수시각효과를 대표하는 영화 장인들의 삶과 영화관(映畵觀), 자신의 일에 대한 노하우 등을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들이 바쳐 온 열정, 고민과 더불어 4대보험은커녕 최저임금도 보장되지 않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현실까지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또한 이 책은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특수효과, 특수분장, 음향 등 영화의 다양한 전문분야에 대한 개념과 이해를 돕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이 책은 열화당과 명필름의 공동기획물이다. 명필름은 2006년부터 파주출판도시 이단계 협동화사업에 참여하면서 원스톱으로 영화를 만드는 공간과 시스템 구축을 준비해 오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주력하고 있는 사업이 바로 ‘영화교육’이다. 2015년 파주에서 출발할 ‘명필름 영화학교’를 통해 젊은 영화인재를 발굴, 육성하는 계획을 가진 명필름으로서는 이들을 가르칠 만한 사람들로 여덟 명의 영화장인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명필름의 이은 대표는 ‘책머리에’에서 그러기 위해선 우선 “영화 제작에 없어서는 안 될 각 전문 분야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쌓아올린,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영화의 발전과 성취를 가능하게 한 이들의 영화 이력과 개인적 삶,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기록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고 말한다.
영화도 문학도 아닌 시나리오를 한 편의 움직이는 영화로 만드는 것은 촬영, 조명, 사운드, 특수효과 등 숙련된 기술 스태프들의 역할이다. 감독의 상상력을 스크린으로 구현해내는 이들의 역량에 의해 영화의 완성도나 작품성이 결정된다. 『우리 시대 영화 장인』은 바로 그러한 영화 안의 또 다른 여러 ‘감독’들을 만나고자 하는 기획에서 출발했다. 이 책의 엮은이로서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옮겨낸 『씨네21』의 주성철 기자는 “한국영화사의 빈자리를 스태프의 이름으로 메우고 서술하는 논쟁적인 재해석이 되길” 바라는 한편, “지금의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서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여덟 명의 장인들이 털어 놓는 ‘나의 영화 이야기’
현장에서 감독과 가장 깊이 교감하는 촬영감독은 시각예술인 영화를 직접 구현해낸다는 점에서 현장의 두번째 감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김우형 촬영감독은 감독의 의도를 꿰뚫으면서도 작품에 대한 집요한 분석과 해석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해내라고 조언한다. 임재영 조명감독은 빛을 이해하는 방법 세 가지로,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터득하는 경험적 방법과, 배운 것을 실전에서 적용하는 기술적 방법, 그리고 빛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깊은 이해력으로 조명을 다루는 창조적 분석법을 들었다. 편집 이상으로 영화 전반을 조망하는 김상범은 ‘짜맞추는’ 것이 아니라 ‘경로를 찾아 나가는’ 편집으로 관객들이 중요한 흐름을 찾을 수 있도록 경로의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리도 하나의 연기’라고 생각하는 김석원은 발걸음 소리 하나하나 마음에 들 때까지 수백 번 반복 채집하며 한국영화계의 열악했던 사운드 현실에 도전해 왔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한 경우는 그뿐만이 아니다. 온몸이 시커멓게 멍이 들고 입안에서 나오는 피도 삼켜 가며 스턴트 연기를 해 온 정두홍은 이제 서울액션스쿨을 만들어 스턴트맨들이 좀 더 안전하게 연기를 할 수 있는 훈련 시스템을 만들었다. 정도안은 한국영화사상 특수효과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 〈쉬리〉와 〈리베라메〉로 박진감 넘치는 총격전 신과 건물을 잡아 삼킬 것 같은 거대한 불길을 만들어내며 관객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과거, 관객의 영화에의 몰입도를 방해하고 영화 자체의 완성도를 저해하는 분야로 인식되었던 특수분장은 신재호를 거치며 이제는 매우 실감나는 질감과 모형으로 관객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마지막으로 할리우드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최고의 실력으로 증명하고 있는 특수시각효과 분야의 장성호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자기 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리 시대 영화 장인』은 각 분야를 대표하는 영화 장인들에 대한 엮은이 주성철의 소개글과 해당 인물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글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각 챕터마다 첫번째 글은 엮은이의 글이고, 두번째 글은 해당 인물의 말을 엮은이가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