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학문분야를 막론하고 지나온 발자취에 대한 연구는 해당 시기의 문헌자료에 대한 철저한 실증을 최우선적이고 필요불가결한 과제로 삼아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미술사를 정리하고 해석, 비평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한국 근현대미술사 연구는 작품론, 작가론 및 이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문헌자료에 대한 기초조사가 빈약한 조건에서 행한 해석이어서,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연구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객관성을 잃은 주관적 해석이 앞설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착안한 저자 최열은 1990년대 초부터 우리 근현대시기의 모든 미술 관련 문헌자료를 착실하게 조사해 나갔고, 이렇게 하나하나 쌓이는 자료에 대한 비평과 해석 작업을 병행했다. 15년간의 지난했던 자료 조사와 문헌 비평 및 해석, 그렇게 해서 맺어진 결실이 두 권의 역저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와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이다.
무엇보다도, 이 두 권의 책은 우리 근현대시기의 모든 문헌자료에 대한 기초조사와 문헌비판 과정을 충실히 했다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는 지금껏 그 필요성은 인식했지만 어느 누구도 엄두내지 못한 방대한 작업이었는데, 저자는 이러한 작업에 15년이라는 세월을 아낌없이 바쳤고, 그 결과 우리 미술계는 1800년부터 1961년까지 160년간의 거대하고 세밀한 근현대미술 지도를 갖게 되었다. 첫번째 권 『한국근대미술의 역사』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19세기와 암울했던 일제 식민지시대에 집중된 연구였고, 두번째 권 『한국현대미술의 역사』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 육이오, 전후 이승만 정권, 4.19와 5.16 등 격동의 현대사에 할애되고 있다.
그중 『한국현대미술의 역사』가 2006년 초판 출간 후 2020년 개정판(전자책)을 새롭게 선보이게 되었다. 1쇄를 소진하기까지 1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기에 재출간 여부를 고심했지만, 관련 문헌을 필요로 하는 소수의 독자를 위해, 새로운 시대 환경에 맞춰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으로 출간을 결정했다. 저자가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연구를 지속해 나가고 있는 힘도 컸다. 이번 개정판은 1950년대 전반기의 내용 중 일부를 수정했으며, 유실되었던 글자를 찾아 넣거나 연도 및 인명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개정판 출간을 앞두고 그간의 소회를 밝힌 저자의 글도 추가되었다.
이 책에서는 해방 이후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대의 조명을 시작으로, 6.25 전쟁 중 미술계의 전모에 대해 밝히고 있으며, 전후 이승만 정권과 미술인들과의 밀착상, 4.19와 5.16을 전후로 한 미술인의 발언과 행적 등에 대해 낱낱이 밝히고 있다. 일례로, 1952년 정부가 제정 공포한 ‘문화보호법’은 훗날 대한민국예술원 설립의 근거가 되었으며, 고희동과 장발을 뿌리로 둔 미술계 파벌 형성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는데, 저자는 이러한 파벌싸움과 미술계 권력투쟁의 흐름까지 당시의 문헌자료를 통해 생동감있게 서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특기할 만한 점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엄두내지 못했던 해방 이후의 미술비평 활동과 미술사상 흐름의 전모를 세세하게 밝혀 놓았다는 것인데, 이로써 오지호·구본웅·길진섭·김주경·박문원·윤희순·김용준·이경성·김영주·김병기·김영기 등의 미술이론과 사상의 전모가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
이 책은 연대기 방식을 취하는데, 한국미술 연구사상 누구도 취하지 않았던 이 방식은 매 시기 미술계를 한눈에 헤아릴 수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한 해 단위로 ‘이론활동 / 산문 및 삽화 / 미술인 / 제작 / 단체 / 교육기관 / 행정기관 / 문화정책 / 미술관, 박물관, 화랑 / 문화재 / 전람회’ 등의 틀로 세분했으며, 또한 모든 항목을 상세하게 나눠 소제목을 붙임으로써 목차의 세부항목이 키워드 역할을 하도록 했다. 매 시기별로 모아 놓은 주석은 ‘한국 현대미술 문헌 총목록’ 구실을 하며, 따라서 이 책은 한국 근현대시기 미술사 사전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방대한 인명색인과 단체색인도 이러한 사전적 역할을 강화해 주는데, 낱말의 풀이나 용어의 해석으로 그치는 일차원적 사전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객관적 사실자료, 해석과 비평이 살아 숨쉬는 ‘한국현대미술사 사전’으로서의 가치는 매우 큰 것이다. 이 책은 한국 현대미술사학의 발전은 물론, 한국 미술사학의 모든 분야에 튼실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이며, 현대사의 면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서도 큰 의의가 있다.
덧붙여, 저자는 연구를 1961년까지로 일단락을 지었지만 또한 책의 말미에 「20세기 후반기 미술사 서술을 위하여」라는 글을 통해 1961년 이후 미술계의 대략적인 흐름과 이에 대한 연구 과제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1961년부터 1970년대 중엽까지를 첫번째 과제로 설정하고 그 수행을 후대 연구자에게 맡기면서, 그 연구과정은 “문헌자료를 요약하는 단순노동이 아니라 연구자의 관점을 적용하는 문헌비판 과정 및 당대를 구성하고 있는 온갖 시대사의 문제를 성찰하는 실사구시의 학문 과정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을 저자는 ‘실사구시의 징험(徵驗) 방법론’이라 부른다. 조희룡·김정희·이유원·김석준이 추구한 실증과 해석의 전통을 대물림한 오세창은 문헌자료 비판을 꾀하여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 스스로의 견해조차 배제할 만큼 실증에만 철저했고, 고유섭·김용준·윤희순 또한 실증과 해석을 조화롭게 추궁해 나갔는데,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 바로 그 ‘징험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야말로 실증의 방법론이며 활동운화(活動運化)는 해석의 틀로서, 징험은 그 두 가지 모두를 아우르는 것인데,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서술하면서 해석과 주장에 앞서 실증을 꾀했고, 비평과 미술계 상황을 문헌자료를 통해 구성한 것이다.
결국 저자는 옛 선인들이 학문하는 자세와 태도에서 이끌어낸 연구방법론으로 이 책을 써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이 시대 연구자들이 다시금 새겨 보아야 할 학문연구방법의 모범이 될 것이며, 이를 바탕삼아 제2, 제3의 연구가 잇따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