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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 엑스 필름에 감도 1600, 셔터 속도 1/5초, 조리개 개방. 맞아요?”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니 환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이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는데 나를 보며 능청스럽게 웃고 있었다. “저는 필리핀 출신의 사진작가 겸 기자예요. 미국 유명 잡지사 몇 군데서 일한 경험도 있죠. 그런데 일하는 동안 압박감이 너무 컸어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요. 그러다 결국 이곳에 오게 되었죠. 당신은 어디서 일해요? 무척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이는데…….”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상태였다. 하지만 언젠가 나 역시 전혀 다른 상황에 맞닥뜨려진다면, 이 남자처럼 정신을 놓아버리고 논리와 이성이 무력화된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세상 끝의 기록 | 존 버거, 장 모르, 민지현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