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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자서전 상세페이지

안중근 자서전작품 소개

<안중근 자서전> 대한의 영웅 안중근이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초대 한국 통감을 지내고 일본 내각 수상을 네 번이나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순국하기 전 옥중에서 집필한 전기가 「안응칠 역사」이다.

안타깝게도 의거 100주년(2009), 순국 100주년(2010)을 맞이한 오늘날까지도 친필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등사본·번역본만 알려져 있다. 안중근의「안응칠 역사」는 안의사가 사형언도를 받기 전날(1909년 12월13일)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 3월15일에 탈고, 93일에 걸쳐 자신의 살아온 길을 기록한 안중근의 역사이다.그러나 친필 원본은 일본에 의하여 공개되지 못하고 그들의 한국지배정책의 자료로만 사용되어 왔다. 비밀은 오래가지 않아 한자로 된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한 번역본과 원본을 등사한 등사본이 안 의사가 순국한 지 60년이 지난 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선 안중근 의사 재판기록과 안중근 옥중자전의 일본어 번역 등사본은 1969년 일본 도쿄의 간다 고서점에서 도쿄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1978년에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고미술상을 경영하던 와타나베 쇼시로에 의하여 알려졌다(나가사키본). 이듬해인 1979년 일본 국회도선관 헌정자료실에 보관중인「시치조문서」에서 「안응칠 역사」와「동양평화론」의 등사합본이 발견되었다(시치조본).

국내에서는 1970년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일본어 등사본을 저본으로 삼아「안중근 의사 자서전」을 간행했으며, 이어서 1979년 순한문본인 나가사키본을 저본으로 1979년에 간행했었다. 이어서 이해에 시치조문서본이 발견되어 나가사키본의 ‘이하 생략’ 부분을 시치조본에서 보완하여 1990년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의사 자서전」으로 간행했다.

32년의 짧은 인생을 오직 겨레와 나라을 위하여 살신성인한 안중근 의사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의 육필로 기록되어 남아 있는 것은 한국독립운동사, 나아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정체감 있고 획기적인 기록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저자 프로필

안중근

  • 국적 대한민국
  • 출생-사망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 경력 한인민회 고문
    대동학교 학감
    대동공보 기자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
    삼합의 설립
    돈의학교 설립
    삼흥학교 설립

2014.12.23.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저자 - 안중근
독립운동가로서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출생했다.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仁壽)이며, 아버지는 진사 태훈(泰勳)이다.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형제로 정근, 공근이 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하였으며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해주감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할 때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 진압군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商)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三興)학교(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천주교 계통의 학교인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즉,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의병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독립전쟁과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해체되었다. 그 뒤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였다. 즉,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를 거사장소로 설정하고,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그는 하얼빈을 담당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이때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빌렘(당시 황해도 신천본당 주임) 신부와 3차례 만나 고백성사를 했으며 자신의 삶을 정리한 20여쪽 짜리 글을 남겼다.
이와함께 안중근의 순국 후인 1910년 봄,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누이동생 안성녀(安姓女), 형의 유족, 자신의 가족, 안공근의 가족 등 권속 모두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해외 망명을 선택하게 된다. 안정근의 첫 망명지는 북만주였다. 다시 얼마 뒤 로서아(露西亞, 러시아)로 옮겨간다.
한편, 안중근은 한말 계몽운동 계열의 근대화론에 영향을 받아 계몽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일제에 대한 폭력투쟁, 즉 의병활동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의 사상을 일면이나마 보여주는 것이 감옥에 있을 때 집필한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이다. 이 글은 서론 부분만 있지만 그의 사상과 활동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당시의 세계정세를 약육강식의 풍진시대로서 서양세력이 동양에 뻗쳐오는 시기로 보았다. 그러므로 동양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서양세력의 침략을 극력 방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보았다. 따라서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양의 동양침략인 러일전쟁 때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내건 일본의 명분은 올바른 것이었으며, 이때 한민족이 일본을 지원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동양평화의 약속을 깨뜨리고 한국의 국권을 빼앗았기 때문에 한국의 원수가 되었으며 이에 한국인들은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 것으로,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自存)하는 길은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청나라에 대한 야욕을 버린 뒤 서로 독립한 3국이 동맹하여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고 나아가 개화의 역(域)으로 진보(進步)하여 구주와 세계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 글은 당시 일본이 주장하고, 계몽운동자들의 일부가 가지고 있던 서양에 대응하는 동양세력의 단결을 주장하는 '동양주의'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된 1905년 이후 대부분의 계몽운동자들이 일제에 대한 투항의 모습을 보인 것과 달리 폭력투쟁으로 나아간 것은 안중근 사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1999년 안중근의사는 아시아의 공동선 실현을 위한 순교자로서 기려졌다.

목차

판권 페이지
01 유년시절
02 동학당 토벌
03 천주교 입교
04 의협청년시절
05 대한제국의 혼란기
06 을사늑약
07 학교 설립, 인재 양성 진력
08 의병활동
09 풍찬노숙과 기아극복
10 이토 거사계획
11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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