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10월 2일 평안남도 평양 상수리에서 기독교 장로인 전주 김씨 대윤大潤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 모친 옥씨玉氏는 후실로, 전실에게서 장남 동원東元이 있었고 동인東仁, 동평東平, 동선東善은 옥씨 소생임.
1912년(12세)
기독교계 숭덕소학교 졸업.
1913년(13세)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
1914년(14세)
도일, 동경학원 중학부 입학. 이 때부터 유아독존적 존재로 자처.
1915년(15세)
명치학원 중학부 2년 편입.
1917년(17세)
명치학원 중학부 중퇴. 부친 김대윤 사망, 귀국.
1918년(18세)
4월 김혜인金惠仁과 결혼 후 도일. 동경 가와바타(川端畵) 미술학교 입학.
1919년(19세)
2월 일본 요코하마(橫濱)시 복음인쇄소에서 인쇄한 동인지 《창조創造》(발행인:주요한) 창간호에 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 가와바타 학교 중퇴, 유학생독립운동사건으로 3월 귀국. 3₩1운동 관련 출판법 위반으로 3개월의 고초 후 6월 집행유예 2년의 형을 받고 나옴.
1920년(20세)
중편 〈마음이 옅은 자여〉(《창조》2〜6호) 발표. 장남 일환日煥 출생.
1921년(21세)
단편 〈목숨〉(《창조》8호), 〈배따라기〉(《창조》9호), 〈연산군〉〈전제자專制者〉(《개벽》3월호), 〈딸이 업을 이으리〉 등 발표. 《창조》는 9호로 폐간. 봄부터 명월관 기생 김옥엽 등과 관계를 맺으며 방탕한 생활을 함.
1922년(22세)
유치장 체험을 소재로 한 단편 〈태형笞刑〉(《동명》16〜17호) 발표.
1923년(23세)
창작집 《목숨》(창조사, 평양) 간행. 단편 〈이 잔을〉(《개벽》1월호), 〈눈을 겨우 뜰 때〉(《개벽》7〜11월호) 등 발표. 딸 옥환玉煥 출생.
1924년(24세)
8월 《창조》의 후신 《영대靈臺》를 주재 발간하고 창간호에 〈유서遺書〉를 발표. 평론 〈소설작법〉(《조선문단》) 발표.
1925년(25세)
1월 《영대》가 5호로 폐간. 단편 〈정희〉(《조선문단》5월호), 〈명문〉 〈시골 황서방〉〈감자〉(《조선문단》1월호), 〈눈보라〉 등 발표.
1926년(26세)
단편 〈원보 부처〉(《신민》3월호) 발표. 보통강普通江 벌 수리사업에 착수하였으나 당국의 불허가로 실패. 이 때의 차용금으로 전 재산을 방매, 파산. 이 무렵 여동생 동선 소유의 평양 하수구리 집으로 이사. 서울 중학동에서 6개월간 하숙생활.
1927년(27세)
부인 김혜인 가출.
1928년(28세)
영화 흥행에 손을 대어 정주, 해주, 선천, 진남포 등지에서 흥행함.
1929년(29세)
단편 〈여인〉〈송동이〉, 장편 〈젊은 그들〉(《동아일보》 연재), 〈대평행大平行〉(《중외일보》 연재, 폐간으로 중단), 평론 〈근대소설고〉 발표.
1930년(30세)
단편 〈여인〉(《별건곤》3, 7, 8월호) 〈죄와 벌〉〈배회徘徊〉(《대조》3월 창간호, 2, 3호), 〈증거〉(《대조》6호), 〈순정〉〈구두〉〈포플러〉〈신앙으로〉〈광염 소나타〉〈광화사〉〈벗기운 대금업자〉(《신민》12월호) 등 발표. 불면증으로 시달리기 시작함. 4월 평남 용강군 출신이며 평양 숭의여고를 갓나온 20세의 처녀 김경애金瓊愛와 재혼, 장편 《여인》을 삼문사에서 간행.
1931년(31세)
봄에 서울 서대문 행촌동 210의 96호로 이사. 단편 〈거지〉(《삼천리》4월호), 〈잡초〉〈박첨지의 죽음〉, 장편 〈대수양大首陽〉 발표. 딸 유환柔煥 출생.
1932년(32세)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동광》1월호), 〈붉은 산〉(《삼천리》4월호), 〈적막한 저녁〉(《삼천리》10월호) 및 장편 〈아기네〉(《동아일보》 연재) 발표. 조선일보 학예부장 40일간 봉직.
1933년(33세)
장편 〈운현궁의 봄〉, 단편 〈화중난무花中亂舞〉 발표, 모친 사망.
1934년(34세)
평론 〈춘원연구春園硏究〉(《삼천리》) 발표.
1935년(35세)
《월간 야담》지에 사담史譚을 발표한 것을 경험으로 12월에는 《야담野談》지에 발간. 딸 연환姸煥 출생.
1936년(36세)
《이광수·김동인소설집》(조선서관) 간행, 영변에 휴양.
1937년(37세)
6월 《야담》에서 손을 뗌. 〈춘원연구〉(완).
1938년(38세)
단편 〈대탕지大湯地 아주머니〉〈가신 어머님〉〈가두假頭〉 등 발표. 장편 〈제성대帝星臺〉를 《조광朝光》에 연재.
1939년(39세)
중편 〈김연실전金姸實傳〉 발표. 《김동인단편집》을 박문서관에서 간행. 박영희, 임학수와 소위 ‘북지황군위문’에 동의, 만주를 다녀옴.
1941년(41세)
단편 〈곰네〉 발표.
1942년(42세)
4월 천황 불경죄로 3개월간 옥고. 딸 유환 사망.
1943년(43세)
아들 광명光明 출생.
1945년(45세)
서울 성동구 약수동으로 이사.
1946년(46세)
장편 〈을지문덕乙支文德〉을 《태양신문》에 연재. 뇌막염으로 중단.
1947년(47세)
서울 성동구 홍익동 353번지로 이사.
1948년(48세)
아들 천명天明 출생. 동맥경화증으로 병석에 눕게 됨.
1951년(51세)
1월 5일 사망, 가장하였다가 수복 후 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