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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1900. 10. 2~1951. 1. 5
1900년 평남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91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학원을 거쳐 아오야마 학원을 졸업, 귀국했다가 다시 동경으로 가서 그림에 뜻을 두어 카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주요한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문예 동인지 《창조》를 동경에서 간행한 후 귀국하였고, 3·1 운동 때에는 출판법 위반 혐의로 6개월 징역, 2년 간의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첫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은 한국 리얼리즘 또는 자연주의의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단편 「마음이 옅은 자여」, 「목숨」 등을 썼고, 이어 자연주의 경향의 「배따라기」, 「태형」, 「감자」, 「김연실전」 등을 발표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광화사」, 「광염소나타」 등은 유미주의, 낭만주의 경향을 보이는 그의 대표작이다. 만년에는 「대수양」, 「젊은 그들」, 「을지문덕」 등의 역사소설을 썼다. 첫 창작집 『목숨』(1924)을 자비로 출판했고, 1925년 무렵 방탕 생활로 파산했고, 수리 사업도 실패했으며 첫 아내와도 헤어졌다.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신문, 잡지 등에 닥치는 대로 역사 소설, 사담(史譚) 등을 썼으나 생계는 더 곤란해졌고, 아편중독증까지 걸렸다. 6·25 때 가족이 피난간 사이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중병으로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 「약한 자의 슬픔」, 「배따라기」, 「발가락이 닮았다」, 「감자」, 「태형」, 「김연실전」, 「광화사」, 「광염 소나타」, 「운현궁의 봄」, 「춘원 연구」, 「붉은 산」 등이 있다.
현진건 1900. 8. 9~1943. 3. 21
1900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 세이조오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해(上海)의 호강 대학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귀국했다. 1922년부터 박종화, 홍사용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지만 《백조》의 낭만주의 경향과는 어긋나는 리얼리즘적 단편을 발표한다. 김동인, 염상섭 등과 더불어 1920년대 사실주의 문학을 확립한 작가로서 세칭 ‘김염현’으로 병칭된다. 조선일보사를 거쳐, 최남선 주재의 월간지 《동명(東明)》의 편집 동인이 되었고 이어 동아일보 사회부장이 되었다. 동아일보 재직시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일장기 말살 보도 사건에 관련되어 1년간 복역했다. 이 사건 이후 서울 자하문 밖에서 양계를 하다가 실패,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대표작으로 「빈처」, 「타락자」, 「유린」, 「할머니의 죽음」,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무영탑」 등이 있다.
이광수 1892. 2. 1~1950
1892년 평북 정주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전국을 휩쓴 콜레라로 부모를 한꺼번에 여의었으며(1902), 여동생을 친척에 맡기고 고향을 떠났다. 친일 단체 일진회의 추천으로 일본에 유학, 메이지 학원 중학부와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17년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1919년에는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해로 탈출, 상해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 주간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재직했으며,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 등과 함께 투옥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친일 어용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1939)을 역임했고, 카야마 미쓰로오(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했다. 광복 후에는 친일의 비난을 받아 은거하며 문필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반민법(1949)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병보석되었다. 6·25 때 납북되어 위협, 설유를 받았으나 북한에 협력을 거부하자 북경대 조선어 강좌 강사로 보내어졌다. 그러나, 북경대 문 앞에서 차에 내리자마자 졸도,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 「무정」(단편), 「무정」(장편), 「어린 벗에게」, 「소년의 비애」, 「방황」, 「재생」, 「흙」, 「사랑」, 「유정」, 「원효대사」, 「옥수수」, 「할멈」, 「민족개조론」, 「춘원시가집」, 「삼인시가집」, 「금강산유기」, 「문학과 평론」, 「수필과 시가」 등이 있다.
나도향 1902. 3. 30~1927. 8. 26
1902년 서울 청파동에서 출생했다. 배재고보를 졸업, 경성의전에 입학했다가 몰래 도일했으나 학비 송달이 없어 귀국, 경북 안동에서 1년간 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이때 이곳을 무대로 중편 「청춘」을 썼으며, 1927년에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홍사용, 현진건, 이상화, 박종화 등과 함께 문예 동인지 《백조》를 발간하여 우리나라 신문학사상의 로맨티시즘 운동을 일으켰다. 연소한 작가라는 점에서 일약 문단의 총아가 되었으나 《백조》 동인 이후 감상주의를 극복하고 사실적인 경향으로 전환,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 등과 같은 완숙한 작품을 썼다. 1926년 재차 도일하여 수학의 뜻을 이루려 했으나 실패하고, 급성 폐렴으로 요절했다. 대표작으로 「청춘」, 「환희」, 「젊은이의 시절」, 「물레방아」, 「자기를 찾기 전」, 「뽕」, 「벙어리 삼룡이」 등이 있다.
최서해 1901. 1. 21~1932. 7. 9
본명은 학송(鶴松)이며 함북 성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성진보통학교 5학년 중퇴가 그의 학력의 전부이다. 17세 때 어머니와 함께 간도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방랑하면서 은돌장이, 삯김매기, 꼴베기, 두부장수 등을 하여 호구를 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이때의 상황은 고국을 등지고 간도로 살 길을 찾아나섰던 빈농의 현실을 그린 단편 「탈출기」(1925)에 잘 나타나 있다. 1920년 무렵에 결혼했으며 귀국하여 어느 정거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1925년 방인근이 발행하는 《조선문단》사에 입사하고, 카프조직에 가담하여 경향파적인 문제작을 발표했다. 그는 스스로 프로문학을 한다고 자처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표현하여 신경향 문학의 한 시기를 그은 작가가 되었다. 《현대평론》, 《중외일보》 기자, 《매일신보》 학예부장을 역임하였고, 위문 협착증으로 의전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 「탈출기」, 「박돌의 죽음」, 「큰물 진 뒤」, 「홍염」 등이 있다.
김유정 1908. 1. 11~1937. 3. 29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1916년부터 약 4년간 한문을 수업하고,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 문과를 다니다가 더 배울 것이 없다는 이유로 중퇴하였다. 그후 전국을 방랑하다가 일확천금을 꿈꾸고 금광에 몰두하기도 했다.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중외일보》에 각각 당선하여 데뷔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독과 빈곤 속에서 자라난 데다가 심한 폐결핵 때문에 자신이 고백한 바와 같이 우울이 성격화되었으며, 스무 살 때 자기보다 1년 위인 기생을 짝사랑했고, 죽을 때까지 3, 4명의 여인을 짝사랑하여 그의 우울한 성격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30세부터 불과 2년 동안 근 30편의 단편을 발표하여 문학 정열이 비상함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의 대부분은 농촌을 무대로 하며, 그들의 물욕, 정욕, 생활 풍속의 단면 등을 현실주의적으로 그린 것이다. 대표작으로 「소낙비」, 「금 따는 콩밭」, 「봄·봄」, 「만무방」, 「동백꽃」, 「따라지」 등이 있다.
채만식 1902. 6. 17~1950. 6. 17
1902년 전북 옥구에서 출생하였다. 경성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개벽》사 기자를 역임하였다. 오랜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개성으로 이사한 후, 창작보다는 마작 등의 잡기로 일제 치하의 암울한 상황을 달랬다. 1932년 무렵부터는 카프에 직접 참여한 일은 없으나 이 시대를 전후하여 동반자적 작품을 발표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가적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된 것은 「레디메이드 인생」(1934), 「인텔리와 빈대떡」(1934) 등의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이후였다. 193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풍자문학을 쓰기 시작한다. 빈곤한 생활 속에서도 사과 궤짝을 책상 대용으로 쓰는 등, 문학 의욕이 왕성했으나, 폐결핵의 악화로 49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대표작으로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탁류」, 「태평천하」, 「패배자의 무덤」, 「이런 남매」, 「가죽 버선」 등이 있다.
이상 1910~1937. 3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보성고보를 거쳐 경성고등공업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졸업하던 해 총독부의 건축 기수가 되었으며, 조선건축회지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다. 처녀작으로 시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를 일본어로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하였고, 서양화 「초상화」를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이후 객혈(喀血)로 퇴직하였고, 백천 온천으로 요양차 갔다가, 그곳에서 기생 금홍과 만났다. 귀경하여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열었고, 금홍과 동거하였다. 구인회 동인이 되어 시 「오감도(烏瞰圖)」를 이태준의 소개로 연재했으나, 난해시로서 일대 물의를 일으켜 독자들의 비난을 받고 중단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의식이 강한 심리 소설 「날개」를 발표했다. 신경질적인 성격에다 숙환인 폐염을 지닌 그는 시대적, 지성적인 고민에서 의식적으로 자기 학대를 감행하여 무절제하고 빈곤한 생활의 저변을 헤매다가, 갱생을 뜻하고 일본 토쿄로 갔으나 이듬해 28세를 일기로 토쿄 대학 부속 병원에서 객사하였다. 대표작으로 소설 「날개」, 「봉별기」, 「종생기」, 「지주회시」, 시 「오감도」 등이 있다.
이효석 1907. 2. 23~1942. 5. 25
1907년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했다. 유진오와 더불어 ‘꼬마 수재’라는 별명을 들었고, 재학중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1933년부터 구인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노령근해」, 「상륙」 등을 발표할 당시, 그의 현실적 관심은 관능적, 성적 인간 본능의 폭로였다. 이어 「돈(豚)」, 「수탉」 이후부터는 동반자적 입장의 작품보다는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작품 창작에 전념했다. 1942년 뇌막염으로 요절할 때까지, 성 묘사의 욕정 소설, 자연적 토착 세계의 리리시즘, 도시적 분열과 자연적 화해의 세계를 다룬 작품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 「노령근해」, 「수탉」, 「분녀」, 「모밀꽃 필 무렵」, 「들」, 「장미 병들다」, 「화분」 등이 있다.
이태준 1904. 1. 7~?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를 거쳐 상지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시대일보》에 한 시골 여자의 문란한 성생활을 치밀한 필치로 그린 「오몽녀」를 게재하여 등단하였다. 1930년대 초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차분한 인물 성격의 내관적 묘사로 토착적인 생활의 단편을 부각시켜 완결된 구성법과 함께 한국 현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한 공로를 세웠다. 1930년대 말에는 「가마귀」, 「복덕방」, 「밤길」 등을 통해 우리 소설 문학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구인회’를 결성했으며, 《문장》지를 주관하였고,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으로는 「해방전후」가 있다. 이 작품으로 자신의 문학 세계의 변모를 합리화한 그는 이후 월북하였다. 그러나, 「소련기행」 등의 저서로 한때 북한 당국의 트집으로 말썽을 일으켰으며, 끝내 자기 모순에 빠져 창작 활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표작으로 「오몽녀」, 「밤길」, 「가마귀」, 「농군」, 「해방전후」 등이 있다.
정비석 1911. 5. 21~1991
1911년 평북 의주에서 출생했고 일본에 유학, 니혼대학 문과를 중퇴하였다. 《매일신문》 기자, 광복 후에는 《중앙신문》 문화부장으로 재직했고, 이후 직업을 가지지 않고 창작에만 전념했다.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처음 시로 출발했으나 이어 소설로 전향하여 단편 「졸곡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성황당」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 당시에 발표한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인 신앙과 애정을, 세련된 감정과 정연한 문장으로 그린 「졸곡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대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고민과 사상을 다룬 것이다. 1954년에 발표한 「자유부인」은 6·25 이후 아메리카니즘으로 인한 사회적인 퇴폐 풍조를 배경으로, 대학의 국문학 교수의 부인이 가정을 뛰어나와 남편의 제자와 춤을 추면서 방탕하게 놀아난 자유부인의 상태를 통해서 현대 여성의 애정 모럴을 탐구해 본 것이다. 이 소설은 본격문학과 통속 소설의 중간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는 비난을 받고도 4만 부 이상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최초로 순수/대중문학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작으로 「성황당」, 「제신제」, 「자유부인」, 「소설작법」 등이 있다.
염상섭 1897. 8. 30~1963. 3. 14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와세다 대학 재학중 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되었다가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정치부 기자가 되었다. 이 해 《폐허》를 창간하여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잠시 오산중학 교사로 재직한 것을 제외하고, 주간지, 일간지, 문예지에서 편집장, 학예부장, 주필,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초대 서라벌 예대 학장이 되었고, 1956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초기작인 「표본실의 청개구리」, 「암야」, 「제야」를 통해서 젊은 지성인의 번민을 북구적인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그려냈지만, 당시의 한국적 현실과는 거의 관련없이 추상적 관념만이 표백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후 「만세전」에서는 구체적인 현실감을 획득하게 되고, 한국의 식민지 현실을 날카롭게 제시, 비판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생활인으로서의 중산층 보수주의를 옹호하게 되는데, 이러한 그의 중간자의 자리, 가치중립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 「윤전기」이다. 1931년에는 「삼대」를 발표하면서 치밀하고 세세한 관찰과 묘사의 수법이 더욱 심화된다. 광복후 만년에 이르기까지는 주로 가정을 무대로 한 인륜 관계의 갈등 대립을 그린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임종」, 「짖지 않는 개」, 「두 파산」, 장편 「취우」등은 역작이다. 대표작으로 「표본실의 청개구리」, 「만세전」, 「삼대」, 「임종」, 「두 파산」, 「일대의 유업」, 「취우」, 「돌아온 어머니」, 「짖지 않는 개」, 「순정의 저변」, 「쌀」, 「신혼기」 등이 있다.
<한국 단편 문학선>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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