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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 국적 대한민국
  • 출생-사망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일
  • 학력 일본 후장대학교 독일어 학사
  • 경력 동아일보 사회부장
    매일일보 기자
    시대일보 기자
    조선일보 기자
  • 데뷔 1920년 개벽 단편소설 `희생화`

2017.01.31.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김동인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금동, 금동인, 춘사 등을 사용했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인 [창조]를 발간하고,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귀국 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었고 사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해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 혁신에 크게 기여했다. 춘원 이광수의 계몽적인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 수법을 사용했으며, 1925년 무렵부터 유행한 신경향파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고 순수문학운동을 벌였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으로 입사했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우익적 성향의 문인단체 결성을 주도하고, 제헌국회의 부의장을 지내는 등 해방 이후에도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쳤으나 중풍으로 쓰러져 1951년 초 하왕십리의 자택에서 병사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이 1955년 제정되어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저자 - 김유정
김유정은 1908년 음력 1월 아버지 청풍 김씨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의 2남 6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유정의 집안은 유복했지만 김유정이 7세 되던 1915년 어머니 심씨가 작고했으며 두 해 뒤인 1917년 아버지도 작고한다. 부모의 작고 이후 유정은 형 유근의 보호 아래 살아가게 된다. 12세 되던 1920년 유정은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5세 되던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이 무렵부터 가세가 기울어 형을 따라 관철동, 숭인동, 관훈동, 청진동 등지로 집을 줄여 이사를 다니는 한편, 유정은 말더듬 교정소에서 치료를 받고 학업에도 문제가 있어 4학년 진급에 실패하는 등 그의 학창 시절은 평탄치 못했다.
유정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어둡게 지배했던 형 유근이 가산을 탕진하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낙향한 것이 1928년으로 유정이 20세 되던 해였다. 유정은 이제 형의 그늘에서 벗어났으나 빈곤한 생활로 곤란을 겪어야 했다. 삼촌 댁에 얹혀 지내며 휘문고보를 다녔고 1929년에 졸업한 후 유정은 둘째 누이 유형의 집에 얹혀 지내게 되었다.
열렬히 구애했던 박녹주에게 거절당한 뒤 유정은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낙향했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실레마을에서 야학을 열어 농우회(農友會)로 발전시키고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개칭하여 간이학교 인가를 받는 등 농촌 교육 사업에 열성을 보였다. 이때의 농촌 체험은 토속성 짙은 김유정 소설의 소재적·주제적 근간이 되었다.
김유정은 1933년 상경하여 누이 유형과 함께 지냈으며 이때부터 그는 폐결핵이라는 치명적인 병마와 싸워야 했다. 1933년 3월에 [산골 나그네]를 [제일선]에, 같은 해 9월에는 [총각과 맹꽁이]를 [신여성]에 발표하며 창작에 몰두했다. 1935년 27세 되던 해에 김유정은 [소낙비]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노다지]로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이후 [금 따는 콩밧], [떡], [산골], [만무방], [솟], [봄·봄], [안해]를 발표하면서 활발한 창작 활동과 문단 활동을 본격화했다. 구인회(九人會)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 것도 이 무렵이다.
춘천 실레마을 시절 탈고한 소설 [심청]을 비롯하여, [봄과 따라지], [가을], [두꺼비], [봄밤], [이런 음악회], [동백꽃], [야앵(夜櫻)], [옥토끼], [생의 반려], [정조(貞操)], [슬픈 이야기]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농촌 배경의 소설 말고도 서울 빈민들의 삶과 당시 세태에 대한 소설은 물론 자전적 소설까지 다양한 작품 경향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작품 활동의 열기와 함께 병세도 악화되었고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병세는 여전했다. [따라지], [땡볕], [연기] 등은 서울에 상경하여 도시 빈민으로 살아가는 농민들의 비극적 삶을 보여주는 한편, 도시 빈민의 군상 중에 자신의 모습도 투영시킨 소설이다. 1937년 3월 절친한 친구 안회남에게 편지를 남기고, 당시 몇몇 젊은 문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유정은 타계했다. 이듬해 그의 단편집 [동백꽃]이 삼문사에서 발간되었고, [두포전], [형(兄)] 등의 소설이 사후에 발표됐다. [봄·봄], [땡볕] 등이 영화화됐고 1968년 김유정 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저자 - 나도향
본명이 경손(慶孫)이고 필명은 빈(彬), 호는 도향(稻香)이다. 서울 청파동의 의사 집안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나병규는 한의사였고 아버지 나성연은 경성의전을 졸업한 양의사였다. 아버지가 의사가 된 것은 할아버지 나병규의 뜻이었는데, 도향의 아버지는 이런 할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의사 노릇 하기를 싫어했으며 문학청년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점 때문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도향의 성장과정에서 이런 집안의 그늘이 그의 감상벽, 방랑벽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문학에 뜻을 두어 중퇴하고 와세다 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학비 부족으로 귀국하여 1920년에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2년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홍사용, 현진건, 박영희, 이상화, 박종화 등과 동인 활동을 했고, [백조]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했다. 같은 해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을 발표한 뒤,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했고, 이어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를 발표했다.
1923년에 [은화 백동화], [17원 50전], [행랑자식]을, 1924년에는 [자기를 찾기 전], 1925년에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 등을 발표했다. 1926년 일본에 다시 건너갔으나 건강 때문에 귀국한 뒤 며칠 후(1927. 8. 26) 사망했다.
초기에는 주로 작가의 자전적 측면에 연관된 내용을 소설로 썼기 때문에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감정 토로, 감상적인 예술가형 주인공이 주로 등장하는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나 곧 습작기의 이런 서툰 창작 형태를 벗어나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후의 작품은 빈곤, 사회적 계급 관계 등 현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낭만주의를 벗어난 사실주의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장편 소설 [환희]는 [동아일보]의 청탁에 의한 것인데, 작자 자신도 "사색과 구상에 들어서 조금도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붓이 내려가는 대로" 썼다고 고백했듯이, 통속 소설의 취향을 따르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사건을 자세히 묘사하기보다는 모호한 내면, 환상, 영탄을 사용하는 등 비극적 운명에 대한 감상주의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러한 나도향의 낭만적 감상주의풍은 [여이발사]를 발표하면서 소설적인 간결함과 냉정한 시선, 객관성을 확보한 문체와 구성으로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초기 소설의 단점을 극복해 낸 이런 소설적 성취는 나도향의 작품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한다. 즉, 낭만주의적인 감상성, 미학주의와 현실 비판의 냉정한 관찰력이 결합된 그의 소설은 인간의 욕망, 내면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적인 것과 그런 욕망이 사회 속에서 드러내는 행태에 대한 객관적 묘사와 관찰을 동시에 보여준다.
생에 대한 원초적 의지와 욕망이 사회적인 제 관계 속에서 드러내는 현상에 대한 그의 고찰은 낭만적 열정과 사실주의적인 '관계성의 냉정한 분석'을 포함한 것이다.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등의 토속성과 원시적 건강성, 생명력이 낭만주의적인 것이라면, 이 세 작품이 암시하는 욕망의 실패와 좌절은 사회적 관계의 부조리가 원인이 된 것이다. 결국, 낭만적 이상이 지닌 건강성은 현실의 타락한 관계, 환경에 의해서 일그러지고 왜곡된다. 나도향의 소설은 이런 일그러진 원초성, 문명 이전의 건강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 또한 중요한 특징과 가치를 지닌다.

저자 - 임상섭
1897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염상섭의 호는 제월霽月, 횡보橫步이며 교토 부립제2중학을 졸업하고 게이오 대학 예과를 중퇴했다. [동아일보] [동명]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의 기자를 지냈고, 만주로 이주 [만선일보] 편집부장을 지냈다. 1920년 동인지 [폐허]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 활동을 시작, 1936년 만주로 이주하기 전까지 한국 문학을 대표할 만한 뛰어난 작품들을 다수 발표했다. [만세전], [삼대] 등이 이 시기 대표작이다. 해방 후 귀국하여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냈고, 작품집 [해방의 아들]과 장편 소설 [취우]를 출간하며 작가로서 제2의 전성기를 보냈다. 1954년 서라벌예대 학장으로 부임,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1963년 직장암으로 별세했다.

저자 - 이광수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가 콜레라에 걸려 죽는 등 불우하고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 동학 당원인 박찬명 대령의 집에 머물다가 1905년 일진회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서 홍명희, 최남선 등을 알게 됐고 메이지 학원 재학 시절에는 톨스토이에 심취하기도 했다. 1910년 메이지 학원을 졸업하고 이승훈의 초청으로 오산학교 교원이 되었다. 1913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상하이로 갔다가 이듬해 러시아 [대한인정교보] 주필로 일했으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귀국했다. 1915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 편입해 수학했다.
1917년 [매일신보]에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했다. 이광수는 [무정]에서 봉건적 질서와 신문명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당시 사회상을 고스란히 그려 냈고, 남녀 간의 애정 문제를 둘러싼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자아와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계몽적 성격까지 담아냈다. [무정]을 통해 그는 한국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흙], [단종애사], [유정], [사랑] 등을 꾸준히 발표하며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일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1922년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1924년 [동아일보]에 사설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는 등 '자치론'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본격적으로 친일의 행보를 걸었다. 해방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1950년 납북되었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저자 - 이상

이상 [저]
본명은 김해경. 한일합병의 해인 1910년 9월 23일 경성부 순화방 반정동에서 아버지 김연창과 어머니 박세창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세 살 때 백부 김연필의 양자로 가서 신광학교, 동광학교, 보성고보를 거쳐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 전신)까지 학업을 마쳤다. 경성고공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일하며 미술과 문학에 자신의 재능을 한껏 펼치기 시작했다.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공모에서 1, 3등에 당선되는가 하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자상(自像)"이 입선, [조선중앙]에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는 등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최초의 객혈을 하며 당시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을 앓게 되어 건축과 기수직을 사직하고 배천온천(白川溫泉)으로 요양을 갔다. 거기서 운명의 여인 금홍을 만나고 구인회 동인들과 어울리며 박태준의 소개로 이태준을 알게 되어 [조선중앙일보]에 유명한 [오감도]연작시를 발표했다. 이어서 문제작 [날개]를 발표하면서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지만 금홍을 마담으로 앉힌 다방 ‘제비’가 파산하면서 경제적 곤경에 빠졌다. 이상은 폐결핵이 갈수록 심해지자 1936년(27세) 10월, 마지막 탈출구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한 좁은 하숙방에서 소설 [봉별기],[종생기], 수필 [권태]등을 비롯해 다수의 시를 미친 듯이 썼다. 다음 해 2월 일본으로부터 ‘불령선인’으로 오인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4일 동안 구속되었다. 석방 후 곧바로 동경제대 부속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레몬 향기를 맡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4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저자 - 이태준
1940년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조치 대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시대일보]에 [오몽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내면서 구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이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문장]지를 주관하다 점차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파 계열 문학 단체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화여전 강사로도 재직하였다.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 많고, 세련된 문장으로 1930년대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다. 특히 단편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하여 '한국의 모파상'이라고도 불린다. 광복 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경향파 문학과 거리를 두었던 이전까지의 작품 경향과는 달리 조선문학가동맹,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였으며, 한국전쟁 이전인 1946년경 월북하였다. 월북하여 [해방 전후]를 발표, 제1회 해방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가 50년대에 숙청되어 파고철 수집 노동자 등으로 일했다고 알려진다.
대표작으로는 [해방 전후] [황진이] [문장강화] 등이 있다.

저자 - 이효석
1907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태어났다.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경성농업학교 영어 교사,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등을 지냈으며, 1928년 [조선지광]에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김기림, 정지용, 유치진 등과 함께 문학 동인회 ‘구인회’를 결성했으며, 이후 단편소설 [돈(豚)], [메밀꽃 필 무렵], [분녀], [산], [들], [개살구] 등과 장편소설과 희곡까지 다양한 장르의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942년 평양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저자 - 정비석
본명은 서죽(瑞竹)이다. '비석'은 스승이었던 김동인이 지어준 이름이다. 191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1932년 일본에 있는 니혼 대학 문과를 중퇴했다. 귀국 후에는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1935년 시 [도회인에게], [어린것을 잃고]와 소설 [여자], [소나무와 단풍나무]를 발표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졸곡제(卒哭祭)]가 입선되었고,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城隍堂)]이 당선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 문인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냈다. 해방 후에는 [중앙신문] 문화부장을 지냈고, 이후 전업 작가로 소설 창작에 매진해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1954년(1. 1∼8. 6) [서울신문]에 연재한 장편 [자유부인]은 당시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아 정비석의 대표작이 되었다. [자유부인]은 전쟁 이후 달라진 사회상을 현실적으로 묘사·풍자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 지식인 계층의 대표 격인 교수와 그 부인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타락상을 드러내고 있어 사회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황산덕은 교수를 모욕한다는 논지로 공개적인 이의를 제기해 '자유부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신문소설의 대중성과 예술성 문제'를 거론, 이후 문단에서는 신문소설의 윤리성과 창작의 자유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여성 단체와 정계에서도 정비석 작가에 대한 고발과 투서가 이어졌다. 이로 인해 [서울신문]의 판매 부수는 세 배로 뛰어올랐다. 정음사에서 펴낸 단행본 [자유부인]은 발매 사흘 만에 초판이 매진되고 총 7만 부가 팔려, 국내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고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이후 정비석은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76년에는 장편 [명기열전]을 [조선일보]에 4년간 연재했고, 1980년에는 장편 [민비]를 발표했다. 1981년 6월 2일부터 1989년 7월 23일까지 8년여 동안에는 [한국경제신문]에 장편 [손자병법(孫子兵法)], [초한지(楚漢志)], [김삿갓 풍류 기행]을 잇달아 연재했다. 소설집으로 [청춘의 윤리](1944), [성황당](1945), [고원(故苑)](1946) 등 80여 권이 있고, 수필집으로 [비석(飛石)과 금강산의 대화](1963), [노변정담(爐邊情談)](1971), 평론집으로 [소설작법(小說作法)](1946)이 있다. 1991년 서울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저자 - 채만식
1902년 전북 옥구 출생.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개벽]등에서 기자 생활을 하였으며,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세 길로]를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풍자 작가로서[레디메이드 인생][치숙][탁류][태평천하]등을 썼으며, 해방 이후에는 [미스터 방][논 이야기][역로]등의 작품을 통해 청산되지 못한 일제 잔재를 고발하거나 미군정하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고발하는 작품을 썼다. 1950년 지병인 폐환으로 영면하였다.

저자 - 최서해
함경북도 성진城津 출생.
호는 서해曙海, 본명은 학송鶴松.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두노동자, 음식점 심부름꾼 등 빈곤층 생활로 전전하였다. 이러한 밑바닥 생활은 그의 문학의 바탕이 되었다. 1924년 단편 [고국故國] 이 [조선문단] 에 추천되면서 등단하여 [탈출기], [기아와 살육] 등을 발표하면서 신경향파 문학의 기수로서 지목되었다. 그의 문학은 '체험문학', '빈궁문학', '저항문학' 으로 규정된다. 최서해는 몇 명의 엘리트의 눈으로 바라본 일부의 삶이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한 대다수의 극빈층의 생활상을 날카롭게 표현해 그들의 울분과 서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저자 - 현진건
1900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보를 마치고 중국 상해 호강江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공부하다 3·1 운동을 맞아 귀국하였다. [개벽] [동명] [시대일보] 등을 거치며 세계 문학 사조와 문화론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단편 소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을 통해 현실 문제를 세련된 형식과 언어 감각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하며 당대 최고의 기교주의 작가로 꼽혔다. 단편 소설로는 일제하 민족 문제를 포괄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고민에서 점차 장편 소설로 창작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 결과 작가 활동 후반에 이르러 단편 소설의 담박한 문장 구성과 장편 소설의 역사적 시간관이 결합된 장편 소설 [무영탑]을 썼다. 단편 소설의 구성과 언어에 있어 뛰어난 감각을 가졌으면서도 장편 소설의 현실 지향성을 작품 세계 속에 포괄하기 위해 노력한 작가다. 1930년을 전후하여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인으로 활약한 바 있으며, 이 시기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43년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편자 - 이남호
[한국단편문학선 1]을 엮었다.

<한국 단편 문학선 1>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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