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아직도 전쟁중이고, 전쟁은 하지 않아야 끝나지, 어떤 명분을 위해서라도 새로 시작하는 전쟁은 결코 마지막 전쟁이 아니었다. 마지막 전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전쟁이다.지압 장군은 그가 맡았던 전쟁을 끝내고, 그의 역사 한 자락 끝을 이불처럼 덮고, 지금쯤 저 아래 석기시대의 어둠 속 자그마한 그의 관저에서 잠이 들었으리라고 한기주는 생각했다.
그는 지압 장군을 다시는 볼 기회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베트남도…….
안정효 소설의 영원한 테마, 전쟁과 인간…
2005년은 베트남 종전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베트남 전쟁은 1955년에 시작되어 1975년에 남베트남과 미국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문득 고인이 된 팝아티스트인 존 레논과 그의 노래 ‘Imagine’을 떠올리게 되는 건 무슨 까닭일까.
우리와 전혀 무관하지 않는 나라 베트남. 당시 미국의 혈맹으로 베트남에서 총을 들었던 우리의 젊은이들은 어느덧 환갑의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바로 작가 안정효가 있었다.
새로운 전쟁문학이라는 호평을 받은 ?하얀 전쟁?, ?은마는 오지 않는다?로 우리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한 작품을 발표했던 안정효. 그가 이번에는 전쟁과 인간이라는 진지한 주제로 ?지압 장군을 찾아서?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작가 안정효가 2002년,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 10주년을 맞아, KBS-TV의 ?일요 스페셜? 제작진과 함께 베트남을 찾아가 호치민(사이공)에서부터 하노이까지 ‘통일열차’로 종단하는 시점에서 출발하지만, 집필 당시인 2005년의 사건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 까닭은, 계속해서 진행되는 역사적인 사건들, 예를 들어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한국군 파병 따위의 중대한 문제를 시한적인 제약 때문에 억지로 무시해서는 안 되겠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통해 과연 작가 안정효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단순히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들려주고 싶은 추억의 회고담일까? 아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아직도 이 땅에 ‘구원’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무의미한 전쟁과, 그 속에서 인간성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를 들려주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지난 세기의 역사의 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40년 만의 결실-지압 장군을 찾아서
어니 파일, 톰 티디,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그리고 또 수많은 종군기자와 작가들이 목숨을 걸고 끊임없이 전쟁터로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의 언론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에서 무엇을 했던가?
베트남인들은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해 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고, 코끼리 미국을 메뚜기 베트남이 전쟁에서 이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최첨단 기계와 정신력의 대결은 21세기 이라크와 다른 분쟁지역에서 어떤 양상을 보여주는가?
존슨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목숨을 걸고 베트남으로 싸우러 간 한국 장병들의 전투수당을 놓고 어떤 흥정을 벌였으며, 과거 베트남의 적이었던 대한민국의 참된 위상은 무엇일까? 그리고 한국 정부와 군은 지금까지 베트남전 동안 국민에게 어떤 형태의 진실을 보여주었던가?
‘사이공’에서 하노이까지 보응웬지압 장군을 만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기나긴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 무엇을 보는가? 수많은 가명을 달고 다니며 한평생 투쟁했던 호찌밍의 승리 뒤에는 지압 장군의 치열한 전쟁과 생애말고 또 무엇이 숨어 있었으며, 자본주의는 이제 베트남에서 어떤 얼굴을 보이는가? 강대국의 식민지 전쟁은 현재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가?
베트남의 전쟁과 역사, 그리고 그 나라에서 또 하나의 역사를 엮어온 대한민국, 그 총체적 결산이 종전 30주년을 맞은 이제 와서야 여기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책은 독특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작가가 밝혔듯이, 이 작품은 호치민(사이공)에서부터 하노이까지 ‘통일열차’로 종단하는 기행(紀行)의 형식을 띠었으나, 화자(話者, narrator)를 작가(안정효)가 아닌 한기주(소설 ?하얀 전쟁?의 주인공)로 내세워 방대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따라서 단순한 기행문의 한계를 넘어 소설적 해석과 상상력까지 동원하여 필자 자신을 해방시켜주기 위한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뿐만 아니라, 책 곳곳에 실려 있는 귀한 사진들 대부분은 작가가 1966~8년 베트남에서 종군을 하며 직접 찍은 것들이다. 그가 이 사진들을 소중하게 간직한 까닭은 ‘진짜 체험담’을 담은 글, 당시에 여기저기 한국?베트남?미국의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했던 글들을 사진자료와 함께 엮어 책으로 만들어 보려는 욕심을 수십 년 동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며, 마침내 40년 만에 이 책으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소설가, 번역가로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 안정효. 이번 ?지압 장군을 찾아서?에는 26세의 나이로 베트남 전쟁에 종군했던 자신의 젊은 날을 반추함과 동시에, 무의미한 전쟁에 대한 경종이 곳곳에 스며 있다. 육순을 훌쩍 넘긴 그에게 이제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남아 있는 베트남. 그 베트남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일지에 대해선 각자의 몫이겠지만, 참 오랜만에 진솔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을 만났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