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先人들이 길어 올린 인생의 샘물
아직은 버리면 안 되는 것들 3
<우리나라 편 2>
사랑의 크기가 그 사람의 크기다
조선 3대 왕 태종은 외손자 권총(權聰)을 매우 사랑했는데, 임금의 무릎 위에서 자란 아이는 버릇이 없어서 어느 날 그만 대신의 긴 수염을 가위로 잘라버리고 말았다.
어린아이의 철없는 장난이었지만 부모가 물려주신 몸은 머리털 한 오라기도 함부로 하지 않던 시대에 이것은 큰 사건이었다. 조정에서는 아이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는 공론이 일었다. 아무리 권력이 막강한 태종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라의 법도가 있으니 아이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수밖에 없으나 아이가 너무 어려서 예절을 모르고 한 일이니 관대하게 처분하여 죽음만은 면케 해주기 바라네.”
결국 태종은 안 보고는 못 견디는 어린 외손자를 숭례문 밖으로 내보내고, 대궐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년 뒤, 태종은 병세가 위중해 자리에 눕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외손자 총이 몹시 보고 싶구나. 그러나 나라의 법도를 어길 수가 없어, 데려오라고 말할 수 없으니 마음이 아프구나.”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절대 권력자라도 예절과 법도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조선 인조 때 대제학, 예조판서를 지낸 이식(李植)은 어려서 경기도 양평에 있는 용문사에서 스님들과 함께 공부했다. 스님들을 따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수양과 학문에 힘쓰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곳의 유념 스님에게 학문과 도의를 배웠는데, 스승이 나이가 들어 병으로 자리에 눕자 간호에 정성을 다했다. 그런 제자가 안쓰러워서 스승이 일찍 자라고 권하자 이식이 대답했다.
“제가 10년 동안이나 스님께 글을 배웠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지금 스승께서 병환이 심하시니 한 글자라도 더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다시 누구에게 배우겠습니까?”
그래서 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세상 만물 중에 스승 아닌 것이 없으니 하찮은 짐승이나 새와 나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거늘, 어찌 내가 죽는다고 걱정하느냐? 내가 죽으면 또 훌륭한 스승이 나타나 가르쳐줄 것이다.”
며칠 후 유념 스님은 병이 위독해져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아무리 초라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말고 배움을 청하여라.”
그 후 이식은 유념 스님의 유언을 잊지 않고 슬픔에 잠겨서도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문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어린 나이에 애는 쓰지만 깨닫는 바가 적으니 참 가엾구나.”
깜짝 놀라 문틈으로 내다보니 절에서 밥을 짓고 물을 긷는 불목하니였다. 그 순간 스승의 말씀이 떠올라 그 불목하니에게 청하여 스승으로 삼고 공부를 계속했다.
지난 10년 동안 배운 것보다 1년 동안에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지구상에서 보기 드문 우리 조상들의 선비정신 가운데 흥미로운 것 중 하나가 사약을 받는 일이다. 다른 문명권에서는 볼 수 없는 일로, 당사자가 자기 손으로 독약을 마시며 죽음 앞에서도 예의를 갖추는 모습은 우리 민족 특유의 충성과 효도, 어진 것과 의로운 것을 공경하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 선비정신을 보여준다.
사약을 사용한 것은 아무리 죄인이라도 천민이 양반을 죽일 수는 없으니, 남이 보지 않는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죽어야 한다는 예우를 갖춘 사형 방법이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임형수(林亨秀)는 강단 있는 선비로, 을사사화 때 권력자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 귀양을 가서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큰 사발에 술을 탄 사약을 가득 16사발을 마시고도 죽지 않아 2사발을 더 마셨고, 그래도 죽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목을 졸랐다.
•숙종 때의 문신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마시고도 죽지 않았다. 서인의 거두이자 당대 정치의 중심이었던 대신을 차마 목을 매어 죽일 수는 없어서 금부도사가 애원했다.
“대감, 제발 죽어주십시오.”
그런 다음 사약 세 사발을 한꺼번에 마시게 하여 죽음을 맞았다.
이 책에는 우리 조상들의 아름답고 훌륭한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아주 좋은 교훈을 남깁니다. 충성과 효도에서부터 청렴과 강직, 근면과 성실, 집념과 용기, 지혜와 의지, 의리와 신뢰, 용서와 반성, 겸손과 아량……. 참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한 정신이 이야기 안에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어도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인간의 기본 덕목입니다.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들을 골라 뽑고, 그 가치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실었습니다.
[책 속으로]
세종이 낸 과거 문제와 장원의 답
1447년, 조선 4대왕 세종 29년에 치른 별시문과에 세종이 직접 문제를 냈다.
왕이 말하노라. 인재는 천하 국가의 지극한 보배다. 세상에 인재를 알고도 쓰고 싶지 않은 임금이 어디 있겠느냐? 하지만 임금이 인재를 쓰지 못하는 이유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인재를 절실하게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셋째는 왕과 인재의 뜻이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명한 인재가 어진 임금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위와 통하지 못하는 것이요, 둘째는 뜻이 통하더라도 공경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임금과 뜻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임금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하가 임금과 통하지 않는 것은 비유하자면 두 맹인이 만나는 것과도 같다. 어떻게 하면 인재를 등용하고 육성하고 분별할 수 있겠느냐, 각기 마음을 다해 대답하도록 하라.
이날의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사람은 강희맹(姜希孟)이었고, 그의 답안은 이런 것이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적합한 자리에 기용해 인재로 키워야 합니다. 모든 일을 다 잘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적당한 일을 맡겨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결점만 지적하고 허물만 찾는다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이 인재를 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이렇게 하면 탐욕스러운 사람이든 청렴한 사람이든 모두 부릴 수 있습니다.
세종은 강희맹의 답을 옳게 여겨, 강희맹의 어머니가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로서 자신의 비인 소헌왕후의 동생이라 자기에게 조카가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답을 장원으로 뽑았다.
【‘현명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 안에서 찾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 안에서 찾는다.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면 훌륭한 사수는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돌리지 않고 자신의 솜씨를 탓한다. 현명한 사람도 이와 같다.’ 세종이 따르고자 했던 공자의 가르침입니다.】
반성은 무겁게, 꾸짖음은 가볍게
조선 전기의 문신 정붕(鄭鵬)은 바르고 깨끗한 태도로 유명했다. 그가 교리로 있을 때 당시의 권력자 류자광(柳子光)은 욕심이 지나치고 무례해서 그 원망이 나라를 휩쓸었다. 그러나 정붕은 류자광의 외가 쪽으로 친척이 되므로 서로 문안을 드리는 예절은 잊지 않았다.
하루는 정붕이 대궐에 숙직을 하러 들어갔는데 바로 그 날 집에 양식이 떨어져, 그 부인이 류자광의 집에 찾아가 식량을 좀 꾸어 달라고 했다. 류자광은 뽐내듯이 웃으며 허락했다.
“친척의 의리는 어려울 때 서로 돕는데 있는 거지요. 그런데 정 교리는 너무 강직하고 괴팍하더군요. 그렇다고 내 어찌 괄시야 하겠습니까?”
즉시 쌀을 자루에 넣고, 장을 항아리에 담아 노새에 실어 보냈다.
정붕이 숙직을 마치고 이튿날 집에 돌아와 보니 뽀얗게 지은 쌀밥이 있어 쌀 구해 온 곳을 물었다. 부인이 사실대로 말하자 정붕은 상을 밀치고 웃었다.
“숙직 들어가던 날 비지죽을 쑤어주기에 양식이 떨어진 것을 알았소. 그런데도 내가 조치를 하지 않았으니 이는 내 실수이지 당신 잘못이 아니오.”
【자기반성은 무겁게 하고, 남 꾸짖는 것은 가볍게 하면 원망이 멀어진다고 합니다. 또한 사람이 한 때 곤궁하고 어려워졌다고 스스로를 게을리 하고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난한 집도 깨끗이 청소하고 가족들이 단정히 빗질을 하면, 그 모습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하더라도 기품은 저절로 풍겨난다.’ 《채근담》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재물에 있지 않아
선조 임금의 딸 정숙옹주는 신익성(申翊聖)의 아내로, 자기 집 뜰이 좁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웃집이 너무 붙어있어서 말소리가 들리고, 처마가 얕아서 다 들여다보이니 바라옵건대 새 집을 샀으면 하옵니다.”
그러자 선조가 말했다.
“말소리를 낮추면 들리지 않을 것이요, 처마를 막으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찌 뜰이 꼭 넓어야만 하겠느냐? 사람이 생활하는 집이란 무릎을 맞댈 정도면 족하다.”
그러면서 갈대를 엮어 만든 발 두 개를 내려주었다.
“이 발을 쳐서 가리면 되지 않겠느냐?”
정숙옹주는 감히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이익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게 되고 원망을 사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하고 천해도 즐겁지만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고 귀해도 근심한다고 합니다. 곧, 작은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것에도 만족할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우정은 역경에서 분명해진다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정효성(鄭孝成)은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했다. 그가 같은 마을에 사는 미천한 신분의 사람과 사귀는 것을 보고, 아들 정백창(鄭百昌)이 여쭈었다.
“아버님께서 이런 사람과 동등하게 사귀시면 예의에 맞는 몸가짐이 아니어서 저희 자식들이 부끄럽습니다.”
그러자 정효성이 웃으며 물었다.
“예의에 어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따지느냐? 그럼 한번 시험해 보겠느냐?”
마침내 아버지와 아들은 밤을 틈타 아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 집으로 찾아갔다.
“우리가 불행히도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네. 죽은 사람은 양반인데, 그 자식들이 만약 숨겨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놈부터 먼저 죽이겠다고 찾아다니니 우리를 받아줄 사람이 없네. 그래서 자네를 믿고 찾아왔네.”
그러자 친구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들어오지 말라고 거절했다. 다른 양반집 몇 군데를 가 보았으나 모두 같은 말을 하며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미천한 사람의 집에 찾아가 먼저와 똑같은 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즉시 안방으로 맞아들이며 아내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이 어른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 만약 그것이 알려지면 우리도 함께 죽는 것을 면할 수가 없다네. 먼저 술을 따끈하게 데워 놀란 가슴을 진정하시게 한 뒤에 드실 밥을 차리게.”
정효성이 돌아보니 아들이 매우 부끄러워했다.
【‘부유해도 가까이하지 않고 가난해도 멀리하지 않음이 인간으로서 대장부요, 부유하면 다가가고 가난해지면 멀리함은 인간 중에 참으로 소인배다.’ 《명심보감》에서 전하는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