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판타지에 대한 관심
중국은 대륙의 지형이 다양하고 인구가 많은 만큼 오랜 역사에 걸쳐 참으로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인간과 동물을 뛰어넘는 기괴한 이야기들은 현재까지도 사람들의 호기심과 공포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로 자리하고 있다. 홍콩의 <천녀유혼>이나 작년 중국에서 개봉한 <백사대전> 같은 영화도 『요재지이』에서 착상하여 만든 영화들이다.
판타지물은 꾸준히 인기 있는 하나의 분야를 차지하여 왔으나 2000년대 들어 새로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분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도 과학이 최대치로 발전한 시대, 시공간을 거스르는 내용이 담긴 <터미네이터> 류의 공상물이 거대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지만 <나니아 연대기>, <해리 포터> 그리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뱀파이어물 <트와일라잇> 시리즈 등으로 전 세계적인 붐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아랑사또전>을 비롯하여 더 넓게는 <옥탑방 왕세자>, <닥터 진>, <빅>, <신의> 등까지 가히 판타지물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현실의 답답한 한계를 넘어서는 세상이 현실 속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판타지물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는 것도 한 원인인 듯하다.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사실일지도 모르는, 사실이기를 바라는 세계에서 얻는 위안 같은 것 말이다.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현실과 동떨어진 소재로 사람들에게 오싹함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 자체가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요재지이』에 나오는 인간 세상을 오가는 귀신, 사람으로 변한 여우, 사람을 사랑한 영물이나 도깨비 이야기는 알게 모르게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우리의 오랜 전설들과 엮여 왔다. 『요재지이』는 아무 생각 없이 읽는 그저 오싹하고 기이한 소설로서의 가치도 충분하지만, 책을 읽으며 현대 동양 판타지물의 변천을 이해하고 우리나라에 전해져 오는 토종 이야기들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부조리한 시대에 자유로운 이야기로 거침없이 반항한 포송령
『요재지이』는 신변잡기나 민간의 이야기를 기록하였으나 들은 그대로 수록하지 않고, 특이한 이야기를 그려내려는 명확한 작가 의식을 가지고 집필한 작품이다.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으며 전해져 오던 이야기였기에 격식에 들어맞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또한 거침없는 성(性)과 자유로운 연애를 묘사한 것들이 많다.
저자인 포송령 자체가 현실 정치와 시대적 기준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내재한 본성을 억압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화려하고 다채로운 수사로써 묘사해 내었다. 『요재지이』가 세상에 나오자 일부 유학자들은 포송령이 지향하는 자유분방한 가치를 경멸하였고 인륜을 망치고 패악을 조장하는 음서(淫書)라고 하였으나, 높은 문학적 완성도로 인해 발간 당시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심을 받았다.
괴이한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촘촘히 얽혀 새로운 세계를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그린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인간의 참다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중국의 기서 중에서도 예술적 향기가 가장 높은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중국의 대표 기서 문학답게 유럽에서도 초역된 바 있다. 고상한 말로 대체하지 않고 세상의 현실, 사랑의 환희와 비애를 생생히 안겨 주는 만큼 이 책은 흥미롭게 읽힌다.
관리들이 혼쭐나는 현실에서 느끼는 백성들의 쾌감
포송령이 이러한 재능을 제한 없이 펼쳐 보일 수 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학문이 뛰어났음에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현실과 형제간의 불화, 가난 등 불우한 삶에 있었다. 그의 고향이 척박한 평원에 광대하게 펼쳐진 지역이었다는 지리적 여건도 포송령의 상상력에 거대한 날개를 다는 중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적막한 삶과 주변 환경이 포송령의 상상력을 더욱 멀리 뻗어 나가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현실에서 좌절당하고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한 만큼 비현실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을 통해 자신의 괴로움을 잊고 털어 내고자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작품 가운데 등장하는 부패한 관리, 타락한 학자ㆍ권세가ㆍ부호 등의 이야기는 작가가 평소 지녀 오던 세속의 인정(人情)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얽혀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요괴들의 판타지 요재지이』는 단순한 읽을거리를 넘어서, 판타지 장르에 진출하려는 예비 작가들에게 일종의 교과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이를 위해 이야기를 끌어 나가는 데에 무리가 없는 구성 위주로 엮고자 했다. 앞으로 판타지 작가를 꿈꾸는 예비 작가들의 동양적인 플롯 구상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책 속 한 문장
한여름의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 부인은 몰려온 무더위를 피해 앓은 속옷만 걸치고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때마침 도사가 진맥을 하기 위해 나타났다. 도사의 눈에 비춰진 부인의 잠자는 모습은 산중 생활에 익숙해진 도사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반투명한 옷 사이로 보이는 요염한 다리의 곡선은 도사의 욕정에 불을 질렀다. 깊은 산중에서 수도에만 전념한 도사였지만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욕정의 늪에 순식간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이른바 의마심원(意馬心猿)의 상태로, 그의 마음은 욕정을 견디지 못하고 원숭이처럼 날뛰었다. 도사는 잠들어 있는 부인의 몸을 껴안고 그녀의 깊은 곳을 침범해 버렸다.
- 도사의 탐욕
지지 않고 맞받아친 백 부인은 뒤이어 바람같이 도운 화상을 몰아쳤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요마를 혼내 준다는 구실로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법술 도사의 사기 수법입니다. 도가나 불가로 지칭되는 대도(大道) 속에서, 서호의 백사를 발견한 것이 뭐가 어떻습니까. 눈으로 볼 때 저는 백사일지도 모르지요. 허나 저는 한 여인으로서 한 남자를 사랑할 뿐입니다. 제가 행한 요술은 남자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한 것으로 결코 벌레 한 마리라도 해친 적이 없습니다. 허선을 약간 괴롭힌 적은 있습니다만 그는 남자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도 즐거웠다고 말할 겁니다!”
- 백사(白蛇) 부인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