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란 본질적으로 평화로운 것이며
전쟁의 비극적 희생물이기 쉽다는 가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사상 전쟁의 무기이자 이데올로기의 온상,
군사 전략의 보고이자 대중 검열의 도구,
전쟁을 견디게 한 군수품이자 포로수용소의 필수품……
우리가 미처 몰랐던 방식으로 세계 전쟁사에 관여해 온
책에 관한 뜻밖의 기록
◎ 도서 소개
전쟁은 책을 만들고 책은 전쟁을 만든다?
전쟁과 독서. 총과 책. 그 유구한 공모의 역사
아르테 출판사 ‘필로스 시리즈’ 42번째 책. 전쟁 수행에 필수적 요소이자 전쟁의 ‘적극적 행위자’로서 책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책에 관한 낭만적 통념을 넘어, 전시의 책이 군사 전략의 보고이자 사상 전쟁의 무기로서, 주요 군수품이자 대중 동원의 도구로서 활약했음을 보인다. 이를 통해 책과 전쟁이 결코 피해-가해의 단순한 구도로 환원될 수 없음을 밝히고, 문자 문화가 전략·정보·병참·선전 등 전쟁의 전 과정에 다층적으로 개입해 왔음을 드러낸다.
소녀의 일기 같은 사적 기록에서부터 대중 소책자와 잡지, 선전용 전단(삐라)과 포스터, 군사 기밀 문서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쓰이고 읽힌 방대한 텍스트를 추적하며, 사회의 여러 층위에서 책과 전쟁이 맺어 온 복잡한 공모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복원한다.
책과 전쟁이라는 장엄한 두 세계를 아우르며 문자 문화의 심층을 새롭게 비추는 현대 인문학의 역작.
√ 정치인, 선동가, 군인, 포로, 독재자, 약탈자, 작가, 편집자, 독자 들이 전시에 책의 힘을 이용하거나 파괴하려 애쓴 방대한 기록을 살피다 끝내 경탄한다. 책의 힘은 얼마나 강하고 다채로운가. (…) 모든 총에 반대하는 책, 총상을 치유하는 책도 있지만 총을 조종하거나 권하는 책, 총의 앞잡이가 되는 책도 있다. 어쩌면 책의 힘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총이다. - 장강명, 소설가
√ 흔히 책의 역사에서 전쟁은 책을 불사르는 악마이자 도서관의 파괴자로 묘사된다. 아무런 죄도 없는 책들이 겪는 수난사는 인간의 야만성과 전쟁의 잔혹함을 알리는 중요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페테그리는 오랜 연구와 수많은 자료를 집약해 책을 순진한 희생자로만 묘사하는 익숙한 전쟁 서사를 거부한다. 책과 독서의 역사 분야의 세계적 대가다운 솜씨다. - 장은수, 출판평론가
◎ 책 속에서
우리는 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책과 문예적 전통이 사람을 가르치고 계몽하며 역사의 진보라는 대의를 뒷받침하며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나치는 폴란드의 유대인 도서관들을 불태워 그들의 문화적 유산을 깡그리 지워 버리려 했고 실제로 대체 불가능한 책 다수를 앗아 갔다. 문예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책에 대한 이 고의적인 모욕이 책을 존중했던 독일인들에 의해 자행됐다는 사실에 가슴 깊이 상처를 입었다. 이 책은 이런 잔혹 행위를 인식하고 되새기려 한다. 그러나 또한 이 책은 도서관을 폭격하고 책을 훼손한 일이 늘 비극이기만 했는지도 질문하려 한다. -8p
교전 중인 나라들은 책, 팸플릿, 과학 정기간행물, 잡지, 신문, 전단, 대형 게시물 등 모든 종류의 인쇄물을 남김없이 동원했다. (...) 인쇄물이 없다는 것은 권력이 붕괴했음을 뜻했다. 1945년 4월 폐허가 된 베를린에서 살아남은 시민들은 ‘히틀러’와 ‘괴벨스’라는 서명이 깔끔하게 손으로 쓰인 벽보 두 장과 대면했다. 벽보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끔찍한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협박했지만 아무도 겁먹지 않았다. 인쇄기가 아닌 손으로 쓴 벽보는 권위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고 애처롭고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만 했다. “저들 둘이 어떤 꼴이 됐는지 보라고.” 한 목격자가 던진 이 말은 당대의 전반적인 경멸의 분위기를 잘 요약해 보여 줬다. -11p
이데올로기 전쟁은 언어의 힘에 정치 생명을 걸었던 지도자들에 의해 벌어지곤 했다. -19p
이데올로기의 온상으로서 도서관은 종종 파괴를 위한 표적이 되었다. …… 도시 중심부에서도 가장 위엄 있는 공간을 점유하면서 한 사회가 귀하게 여기는 가치를 공적으로 드러냈고 …… 이런 시설을 파괴하는 것은 적대국 시민사회의 심장부를 꿰뚫는 일이었다. -27p
[나치의] 신문과 잡지에서는 두 가지 주제가 강조되었다. 정치적이고 인종적인 이유로 나치의 과업에 대항하는 적을 폄하하고 비인간화했고 독일을 구원할 유일한 희망으로서 총통을 신격화했다. 병사들의 서신을 보면 전선의 많은 병사가 이런 메시지를 내면화했음을 보여 준다. -110p
4년 동안 적산관리국은 각기 다른 출판물 116종을 복사해서 신청자 900여 명에게 배포하도록 허락했다. 그중 거의 모든 것이 전쟁 수행과 관련된 문헌이었다. 그때까지 감탄을 독점했던 독일 과학의 그늘에 가려 기를 못 펴고 있던 미국 과학계에 제2차세계대전은 많은 측면에서 너무도 늦게 찾아온 성년식이었다. -140p
거대한 정보 수집 작전이 수행되려면 군인과 전시산업과 발맞춰 일할 수 있는 대학의 인적 · 물리적 자원이 필요했다. 과학자들이 전시산업의 긴급성에 맞춰 자신들의 연구를 조정했던 것처럼 정보업무는 또한 인문학자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기회였고 그들은 기꺼이 그 기회를 잡았다. 역사학자, 고전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들은 정보업무에서 제 역할을 찾을 수 있었고 몇몇 학자는 앞으로 전개될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오랜 세월 기록보관소에서 갈고 닦은 그들의 분석력은 학계에 몸담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도서관 사용법을 꿰뚫고 있었다. -154p
제1차세계대전은 영국과 독일이라는 의심의 여지 없는 당대 세계 출판산업의 두 초강대국을 서로에 맞서 겨루게 했다. 프랑스가 성숙하고 정교한 출판산업을 자랑삼고 미국 출판업은 상승 곡선을 그리며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면 영국과 독일은 견줄 데 없는 최고였다. -215p
병사들은 양장본을 사느라 큰돈을 쓸 필요 없이 페이퍼백 몇 권 정도는 갖고 다녔고 그냥 버리기도 했다. 페이퍼백은 전투복 상의나 하의 주머니에 넣기에도 맞춤했다. 그런 사정을 헤아린 끝에 1942년 전쟁 중 가장 성공적인 출판 사업인 진중문고가 탄생했다. -236~237p
진중문고 대부분이 인기가 높았지만 단연 최고의 읽을거리는 주간지(《타임》 《뉴스위크(Newsweek)》 《라이프》) 소형판과 만화책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은 만화의 황금기와 겹쳤다. 슈퍼맨은 1938년에 처음 선보였고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이 참전하기도 전에 첫 호(1941년 3월) 표지에서 히틀러와 대결을 벌였다. -342~343p
많은 작가가 자기 책이 문고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했고 영광으로 생각했다. 스콧 피츠제럴드에게는 그의 걸작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로 이끌었다. 1925년 출간되었을 때 실망스러운 반응을 얻었지만 진중문고로 출간된 것이 개츠비를 비교적 외면당하던 처지로부터 구출해 냈다. -342p
요제프 괴벨스도 자신이 진지한 작가로 취급받기를 갈망했다. 그의 복잡하고 열정적인 소설 『미하엘(Michael)』은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했고 공공도서관에서도 나치를 지지하는 자들이 쓴 복잡하고 따분한 책보다 훨씬 더 자주 대출되었다. -381p
안네와 가족에게 책은 생명줄이었다. 용감하고 충실한 도우미 중 한 사람이 암스테르담시립도서관에서 매주 책을 빌려다 주었다. 은밀한 피신처의 삶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으로 꼽을 만한 일이었다. -392p
수용소 밖의 전시 상황에서는 특히 종이부족과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 더 짧은 책을 내고 읽는 경향이 조성되었다. 이와 달리 포로수용소에서는 장시간 독서를 위한 시간이 났기 때문에 많은 경우 길면 길수록 더 좋았다. 수용소 도서관에서는 위대한 고전문학이 헌신적인 독자를 찾았다. -396p
읽을거리의 부족이 전쟁 중 가장 흥미로운 출판적 발상으로 꼽히는, 특별히 독일 전쟁포로를 위해 독일어 번역서로 총서를 만드는 사업에 불을 붙였다. 이 사업은 미국 정부가 후원하고 망명한 독일 출판인 고트프리트 베르만 피셔(Gottfried Bermann Fischer)와 펭귄북스 미국 지사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 책은 토마스 만과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같은 작가를 비롯해 주로 베르만 피셔가 저작권을 소유한 독일 문학 작품 중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것이 선택되었다. 두 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독일에서 금서였다. -413~414p
1940년에 독일이 도서관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부분적으로는 제1차세계대전 후 파괴된 장서를 채우기 위해 기부를 강요당한 것에 분개심이 발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부된 책 30만 권 하나하나마다 독일의 굴욕을 기념하는 장서표도 첨부되어 있었다. -473p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책과 도서관에 대한 전쟁이 아무리 가차 없었다 할지라도 인쇄 기술 발달로 역사의 매 순간 책은 파괴되는 양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전쟁의 경제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다. 모든 전후 청산 작업에서 잘 알려진 것처럼 건물과 기간시설 파괴 비용은 재건 비용보다 훨씬 저렴하다. 인쇄기가 없는 곳이 없고 책을 만드는 데 드는 단위비용이 낮다는 사실은 전쟁에 시달리는 책의 최대 방어 수단이다. 박물관의 유물이나 미술품은 대체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라진 책은 다른 도서관이 보유한 수많은 장서로 대체할 수 있다. 더 수많은 개인문고가 대신할 수도 있다. 책과 책이 영원성을 부여한, 책 속에 든 생각은 우리보다 오래 살 것이다. 최초로 인쇄된 책들이 최초의 자랑스러운 소유자가 죽은 이래로 스무 세대가 왔다가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59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