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다시 태어나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는 여자가 여자에게 건네는 다정하고 솔직한 수다 에세이다. 가장 먼저 강렬한 제목이 눈에 들어오지만, 제목과 달리 아주 편안하고 유쾌하게 읽히는 것이 반전이다. 여성들의 삶에 대한 깊은 고민과 진솔하고 현실적인 조언으로 사랑받아온 베스트셀러 작가 남인숙의 꾸밈없는 글이 공감을 자아내며 우리를 웃고 울게 한다. 네이버 ‘출간 전 연재’ 포스트를 통해 사전 공개된 내용에는 수많은 여성 독자들의 절절한 댓글이 달렸다. “별 생각 없이 글을 읽다 엉엉 울고 말았다”,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불안함을 다독일 수 있었다”, “같은 고민을 하는 동료가 생긴 것 같아 위안을 받았다” 등등 미혼이든 기혼이든, 아이가 있든 없든, 20대든 30대든 40대든, 한껏 위로받고 공감하면서 책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열렬히 토로하기도 했다.
책을 읽다 보면 발칙한 제목에 대한 의문도 풀린다. 이번 생(生)을 아주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기에, 다음 생에서까지 똑같은 역사를 이룰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작가의 논리다. 남인숙은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한 인간으로서의 불안함, 인생의 조연으로 밀려나는 것만 같은 헛헛함,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들을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게 풀어놓는다. 산다는 것이 힘들고 지치는 일인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나이 들수록 삶은 점점 더 재미있어지더라는 작가의 글은 환한 희망을 준다. 더불어 글이 한층 소탈하고 편안해졌다고 느껴지는 것은, 책 속 어느 에피소드처럼 그녀의 글에도 ‘엄마 냄새’가 묻어나는 덕분일까.
<책속으로 추가>
한때 주연이었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다. 최대한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버티다가 기력이 다해 맨 밑바닥으로 추락하거나, 적당한 때에 스스로 몇 계단 아래로 내려와 보다 넉넉한 곳에 자리를 잡거나. 몇 계단 아래의 피라미드에서는 첨탑 같은 꼭대기에서 볼 수 없었던 세상 풍경을 내려다볼 여유가 생길 것이다. 한때 모두가 주연이었던 우리는 이제 몇 계단 아래로 내려와 조연으로서의 삶을 즐길 때가 된 것 같다. 때가 되었는데도 주연 자리에 미련을 놓지 못하고 새로 올라오는 이들의 손마디를 밟아 떨어뜨리는 이의 모습은 추하다. 나는 삶의 횡단면에서 주연 사퇴를 한 요즘이야말로 내 삶 안에서는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타인의 기대와 시선, 무지와 부족한 판단력 등에 묶여 꼭두각시 주연으로 살아온 젊은 날에서 해방되어 내가 쓰는 대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진짜 주연 말이다.
_「이제 세상에서 영원한 조연으로 밀려나는 걸까?」 중에서
이십 대 때 대중목욕탕에 가면 종종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곤 했다. 꼭 한 번은 내 벗은 몸을 빤히 보는 중년 이상의 아주머니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이었다. 무안하고 부끄러웠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게 예의인 곳에서 그런 노골적인 시선이라니!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눈빛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내 배가 너무 나왔나? 체형이 특이한가? 하지만 친구들에게 물어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만 겪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차라리 그 대상이 이성이면 불쾌할지언정 이유라도 명확할 텐데, 성별이 같은 중년 여성들이 왜 그러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이유를 알겠다. 대중탕을 싫어하는 나는 따뜻하게 샤워할 수 있는 집에서 살게 되면서부터는 목욕탕이라는 곳에 거의 가지 않았다. 그러다 아이가 자라 워터파크에 가자고 조르기 시작하면서 그곳에 딸린 대중탕에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다. 그런데 딸아이와 내 몸을 씻기 바쁜 와중에도 젊은 아가씨들의 몸에 저절로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다름 아니라 너무나 예뻐서였다.
_「아줌마들은 왜 목욕탕에서 남의 몸을 훑어볼까?」 중에서
얼마 전까지 외로움 앞에서 내 대처 방식은 졸렬했다. 또 다른 집안일을 찾아 하릴없이 배회하는 집 안의 방랑자가 되거나, 침실로 들어가버리거나. 내 기분을 말하기는 싫지만 조금은 눈치채주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이제까지의 내 경험대로, 말하지 않는 것을 알아채는 가족이란 흔치 않으며 내 가족은 흔한 부류였다. 더구나 내가 느끼는 기분이란 말해도 알아먹을 턱이 없는 미묘한 것이었다. 그러다 하루는 집안일을 끝낸 후 몸이 너무나 피곤했다. 당장 소파의 안락함이 필요했고, 그날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기역 자로 누운 그들 사이에 몸을 던지고 퍼져 앉았다. 순간 양쪽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엉덩이에 다리나 머리가 깔린 가족들은 이내 몸을 움직이고 다리를 접으며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냈다. 내가 끼어들 틈이 없다고 생각했던 공간에 실은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가족들과 살을 맞대고 자리다툼을 하며 난 어느덧 그들과 함께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_「집 안에 내 자리가 없을 때」 중에서
누군가 코트 하나에 반해서 무리해서라도 사고 싶다, 어떻게 할까, 라고 물으면 나는 품절되기 전에 얼른 사라고 한다. 의외로 쇼핑을 하면서 홀딱 마음을 빼앗길 만한 코트를 만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남편감에 대해서 같은 질문을 하면 그렇게 대답 못 하겠다. 코트처럼 반품이나 교환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품, 교환, 환불, 수선, 재판매 등등이 모두 불가능하기에 원래 내가 선택한 때에 미처 보지 못했던 본질까지도 끌어안아야 한다. 그래도 이 남편이라는 코트는 입을수록 낡아가면서도 편안해지는 구석이 있다. 남의 것, 새것에 대한 아쉬움이 없다. 이번 주말에는 이 오래된 코트에 스팀 다림질 한번 먹여 함께 외출이나 해야겠다.
_「남편감 고르기와 코트 고르기의 공통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