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미터부터 킬로미터까지, ‘디자인된 일상’의 세계를 탐험하다
이 책은 어느 게으른 건축가가 쓴 ‘디자인된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탐험기다. 건축가 특유의 사고로 우리 주변 세상을 mm, cm, m, km라는 스케일 단위로 구분해서 우리가 털끝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지나쳐왔던 평범한 일상에 대해 탐색하는 책이다. ‘애정에서 비롯되지 않은 관찰은 허구’라고 여기는 저자가 우리의 관심밖에 있던 평범한 물건들의 디자인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짐작하지도 못했던 다양하고 섬세한 문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세밀한 만큼 치열해서, 작은 만큼 밀도가 높은 밀리미터(mm)의 세계, 손바닥을 벗어나 공간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센티미터(cm)의 세계, 몸을 감싸는 환경이 되고, ‘우리’ 사이의 교감이 중요해지는 미터(m)의 세계, 지각의 한계에 도전하며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킬로미터(km)의 세계 속의 우리를 지배하는 힘과 생각들을 탐험한다.
“변태나 오타쿠로 오해받을지라도,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것들을 못본 척 할 순 없다”
이 책을 쓰게 된 저자의 신념이다. 아니 ‘신념’이라기보다는 ‘기질’이라고 해야 옳겠다. 태어나서 원하는 집 한 채 갖는 게 여러 가지 비범한 능력과 유산, 운을 소유해야만 하는 대한민국에서, 집을 설계하는 건축가로서 자기의 집에 대한 욕심이나 이름을 날리는 건축가가 되려면 부지런히 자기개발하고 강단 있게 처세해야 함에도 그와 반대로 ‘게으르다’는 것에 철학을 갖고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인간이니 말이다. 자기 소유의 집도 자기 이름으로 된 건축사무소도 없는 저자의 ‘게으르다’는 정의를 들어보자.
게으르다; 1. 당장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부질없고 사소한 것들에 대해 애정과 노력을 과도하게 투자하려는 성향이 있다. 2. 결과보다 과정에 더 신경을 쓰려는 성미나 버릇이 있다. 3. 고민 없이 달려가는 것보다는 멈추어 쉬거나 차라리 몇 발자국 물러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아직까지 그에게 집은 세상이고 길거리이다. 그래서 지하철의 비상손잡이부터 국토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까지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리라. 내꺼, 자기 집, 자기 식구에 대해 갖는 애정에 갇히지 않고 공공의 풍경을 자신의 소유인 양, 애정을 갖는 특이한 남자. 과연, 이런 캐릭터의 저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급하게 헐어버리는 동대문운동장을 보며 치기어린 청소년 시절의 일기장을 없애버린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엉뚱한 데로 나 있는 도로의 점자블록 때문에 당황해할 시각장애인의 심정을 느끼는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상하행선 사이에 나있는 마름로꼴 철물만 보면 변태 스파이더맨처럼 기어올라가고 싶어하는, 호기심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 책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이런 캐릭터를 ‘천경환스럽다’로 정의내리게 된다.
천경환스럽다; 사소한 것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고 진지하게 해석한다. 숨겨진 이유와 의도에 대해 따지고 상상하길 즐긴다. 평소 살아가는 모습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지만, 모두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소유라고 할 수 없는 공간이나 물건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나를 둘러싼 일상적인 세상이 색다르게 다가오는 책
늘 “몸”에 닿아있기에, 분리된 대상이 아닌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 밀리미터(mm) 장에서는 저자의 눈과 머리 역할을 하는 ‘똑딱이’ 디카, 늘 쓰면서도 한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돈, 어릴 적부터 책상에 서 있으며 무의식적인 미학관을 갖게 한 ‘건담’, 세상에 세속적인 안부를 전하고 받는 연하장 이야기를 다룬다. 손바닥 위의 세계와 몸 바깥의 세계가 겹쳐지고, ‘나의 물건’과 ‘우리의 물건’이 공존하는, 센티미터(cm) 장에서는 왁스, 우산, 회의 테이블 디자인과 지하철 주변 안내도와 비상 손잡이까지, 사적인 것에서 공공의 물건까지 시선과 사고가 확장된다. 지하철 안에서 정신병자나 위험인물로 몰릴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비상손잡이 디자인을 탐색하는 내용을 읽다보면 같은 한 시민으로서 저자에게 묘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미터(m)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몸과 분리된 대상은 비로소 몸을 감싸는 환경이 되고, 그 환경 속에서 나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존재하고 있었던 ‘타인’에 대한 의식이 생긴다. 여기서 저자가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도시의 길바닥 디자인에 대한 깊은 사색이 등장한다. “길바닥은 보도블록, 맨홀, 볼라드, 가로등, 가로수, 각종 안내판 등 다양한 시설이 설치되는 바탕이고 지상과 지하를 무대로 끊임없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온갖 아이템을 아우르기 위한 입체적인 근거”라는 시각을 접하며 생각이 지평이 넓어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보이지 않는 공간까지 투사해내는 건축가의 입체적인 사고를 맛보는 지적인 재미를 느끼게 된다. 단순한 ‘스케일의 확장’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킬로미터(km) 장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도시고속화도로다. “도시고속화도로는 기존의 보행자 시점의 콘텍스트가 제거된 추상 공간이다. 도시 조직의 틀을 초월하며 가로지르기에 훨씬 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듯한 인상 또한 받게 된다. 골목길, 큰 길, 강, 마을, 건물과 같은 도시 조직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이 일상적인 시퀀스(sequence)와 위계에 상관없이 다시 배열되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킬로미터 장까지 읽지 않고 이 책을 덮는다면 이 책의 백미, 하이라이트를 맛보지 못하고 덮는 것이다. 이전의 장에서 욕심내지 않고 차곡차곡 점증적으로 시선과 사고를 넓혀왔다면, 저자가 이끄는 대로 이 장에 들어서면 이 장이 제공하는 광대한 스케일의 사고와 추상적인 감각을 다루며 현실에 재현해내는 건축가적인 생각법의 묘미를 맛보지 못하고 덮는 것이리라. 하여 이 책은 눈에 들어오는 아이템부터 골라 읽는 독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내길 권한다. 밀리리터부터 킬로미터까지 점증하는 사고의 확장을 경험하길, 권한다.
< 책 속으로 >
나는 가끔씩, 없애버렸던 그 일기장들이 아직 책상 서랍 속 어디엔가에 남겨져 있다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꾸 작아지기만 하는 꿈을 발견하며 용기와 위안을 얻고 싶어질 때마다, 투박하고 유치했던 그 일기가 적지 않은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이라 상상한다. 온 세상이 두렵고 낯설게만 느껴졌던 꼬마 시절의 나도 나였고, 폭풍 같은 사춘기의 한 가운데에서 낯뜨거울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유치할 정도로 순진했던 나 또한 나였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다. "성숙한 인격"이라는 것은 아무런 결점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는 완전무결한 인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 것이다. 자랑스럽고 좋은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는 동시에, 부끄럽고 외면하고 싶은 기억 또한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간직할 줄 아는 마음, 인생의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성숙한 인격을 갖추기 위한 중요한 조건들 중 하나라고 믿는다. 서울의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중고등학생시절의 일기장들을 없애버린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최근에 지어지고 있는 새 건물들은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고 있지만, 그다지 멀지도 않으며 동시에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과거를 실감할 수 있는 흔적들은 가면 갈수록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희미해져만 가는 흔적들이 가리키는 시기는, 현실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껄끄러웠던, 그리고 수시로 과거에 대한 부정을 강요 받아야 했던 시기와 묘하게 겹쳐지는 듯도 하다. 아직도 우리는 특정 시기의 역사를 당당히 대면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껄끄러움을 무관심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km장, ‘동대문운동장’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