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철학, 미학, 사회학, 생태학을 넘나드는 연구로 이 시대의 지성 중 하나로 여겨지는 박이문 선생이, 지난 몇 년 동안 발표했던 논문들을 모은 [이성의 시련]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일상의 그가 그렇듯, 그의 논문들은 무척 어렵고 중요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 글은 쉽고 질박하면서도 강한 긴장과 호소력을 깊이 지니고 있다.
이 책에 모은 글들은 지난 몇 년 동안 학술지, 여러 학회에서 지정받은 특정한 주제에 맞추어 발표했던 논문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없고, 전체적으로 하나의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각기 별개의 주제들이기는 하지만 저자는 그의 중요한 철학적 관심에 초점을 맞추어 모든 문제를 접근해보고자 노력했다.
이런 점에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그의 일관된 철학적 관점이 엿보인다. 지난 십 년 동안 나의 주요한 철학적 관심 중의 하나는 니체에서 시작하여 푸코 그리고 데리다를 거치면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같이 사뭇 흔들리고 하나의 허구로서 부정되고 있는 이성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옹호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전개, 생명공학, 종교, 환경, 근대 문명사, 니체 철학과 동양사상, 미래의 문명과 선불교, 국학, 과학적 이성과 동아시아적 사상 등의 문제들을 비평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이성의 재정의, 재구성, 재해석을 시도해보려고 애썼다. ―「책머리에」에서
저자는 이 책에 실린 「21세기 게놈 시대와 종교 문화」라는 글에서, 종교인은 게놈 프로젝트에 대응하기 위해서 신비롭기만 한 인간의 인체조차 완전한 물질적 조작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현재 게놈 프로젝트는 "과학적 기적"으로 종교인에게 전통적인 믿음과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도록 강요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인은 자신의 가치와 행위에서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21세기 게놈 시대에 종교는 존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저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유전자 공학을 비롯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할지라도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의식하는 인간으로서 종교적 감정과 행위는 사라질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게놈은 인간의 어떤 측면의 서술에 불과한 것이지 인간 그 자체를 완전히 서술해주는 것이 아니"며 "종교는 어떤 경우에도 물질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의, 우주의 형이상학적 존재를 전제한다"고 강조한다. 즉, 게놈 프로젝트를 유물론적 세계관의 입증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는 오히려 물질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뉴 밀레니엄의 문명 패러다임과 선(禪)"에선 인류 정신문화를 이끌 절실한 화두로 "선(禪)"이 주목받는 가운데 "21세기 문명의 패러다임은 무엇이고, 그 패러다임은 선불교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저자는 21세기의 문명을 지배할 패러다임 즉 세계관을 분석하고, 그러한 문명의 문제를 추측해본다.
어떤 점에서 선불교가, 예측되는 21세기 문명의 문제를 풀고 그 문제로 해서 생기는 문명사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잡이와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성찰해보면서 새로운 과학관과 선불교의 재해석과 재평가를 추구하고자 한다.
근대 문명의 폐해 극복을 위한 새로운 사상적 대안 모색―생태학적 세계관과 미학적 이성 제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근대 이후 놀라운 과학적, 기술적 발전을 바탕으로 인류의 보편적 규범이 되어온 서양의 합리성이 오히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생태학적 위기를 발생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근대 문명의 부산물인 환경 문제가 인류에게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 자연의 황폐 등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위협을 주고 있어 인류의 생존을 위해 세계관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게 그의 일관된 생각이다. 즉 인류의 생존은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생명 중시 사고로의 전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한 사회의 문명 즉 사회적 진보는 사실상 진보가 아니라 후퇴,위험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사회의 문화 즉 이념, 생활 표현 양식은 어디까지나 한 사회의 구성원의 주관적 기호,취향을 나타내는 것인 만큼 현대 문명의 역사적 위기는 현대인의 근본적 사고의 개혁 즉, 현대인의 문화적 전환으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과학적, 서구적 시각에서 현 시대를 객관적으로 점검하여 그에 대한 답을 동양적 사고에서 찾아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보다 밝게 희망할 수 있고 꼭 희망해야 하는 유일한 21세기 문화는 인간 중심적 첨단 과학 문화가 아니라 우리 자신과 자연 및 그것들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한 "생태학적"인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