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과학문화유산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과학은 선조들의 믿음이자 희망이었다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문화유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명을 받곤 한다. 각각의 문화유산에는 그 지역과 민족 특유의 역사와 문화, 과학까지 총체적으로 담겨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세계를 압도할 만한 과학의 결정체인 문화유산이 많다. 하지만 우리 유산의 과학성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역사 속에 묻혀 있기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실은 우리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선조가 남긴 유산을 대할 때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다. 앞선 문명을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이 발견되면 당연히 타국(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객관적인 눈으로 비추어보면 우리의 문화유산이 모두 외부에서 전수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화유산에서 과학성은 무엇보다 인간과 관련되어 논의되어야 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희로애락을 느끼며, 이는 인간이 지닌 특권이다. 이 특권을 보다 값지게 만들거나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것이 과학이다.
우리 선조들은 과학이라는 단어를 쓰기 이전부터 과학을 생활화하고 있었다. 장승, 솟대 등 많은 민속 문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들에 우리 선조들의 부단한 믿음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이들이 존재함으로써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에서 심신의 치유와 공동체 의식의 강화 등 기대에 상응하는 보답을 유·무형적으로 받은 것이다.
인간의 삶에 순기능으로 작용하는 문화유산은 이처럼 과학적인 속성을 지닌다. 이를 통해 우리만의 지혜와 깨달음이 담긴 과학문화유산이 많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저자는 그러한 ‘우리 과학문화유산’으로 조선 왕릉과 전통 마을을 소개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하나하나 밟아나간다.
전통 마을은
역사가 남긴 신비로운 공간이자
과학이 담긴 지혜로운 공간이다
‘지속 가능한’ 우리의 전통 마을
근대 한국의 개발 신드롬을 생각하면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이 보존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꿈이나 마찬가지다. 최소한 30~100여 호 이상의 마을에서 길, 외부 공간, 조경을 훼손 없이 보존하려면 개인이나 가족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불가능할 것 같은 역경을 이겨내고 아직까지 과거 환경을 보존하고 있는 전통 마을들이 있음은 놀랄 만한 일이다.
과학이 있는 한국의 전통 마을이라는 것은 지속 가능한 장소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떤 곳이 그런 장소일까.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제시한 주거지 선정의 기준은 자연 환경에 해당하는 지리地理, 지역 경제 기반으로서의 생리生利, 풍속과 공동체 의식 등 사회적 인자로서의 인심人心, 인간과 자연과의 심리적 조화를 강조한 휴양 공간으로서의 산수山水 등 4가지다.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집터를 선정할 때는 반드시 지세의 기운이 모이고 전면과 배후가 안온한 곳을 가려야 한다고 기술했으며,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정주지 환경 조건을 제시하면서 입지론과 토지 이용, 정관 등에 관한 규범적 원칙을 광범위하게 언급했다.
선조들이 견지했던 터 잡기 논리는 자연 순응적이며 친환경적인 토지 이용을 기본 전제로 생태적인 접근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낙토로서의 마을 자리 잡기와 가꾸기 과정은 오늘날 공간에 대한 이해와 평가, 잠재력 및 대안 제시 등 경관 설계 과정과 일맥상통한다. 온고지신의 의미를 일깨우는 환경 설계 논리인 것이다.
공간은 인간에게 보다 쾌적한 환경이어야 하고, 이를 위한 원천적인 문제는 과학이 해결한다. 전통 마을을 답사하면 과학적인 아이디어를 수시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10군데의 전통 마을을 찬찬히 거닐어보자. 마을이 형성된 배경뿐 아니라 마을을 조성한 선조들의 과학적 배려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전통 마을의 체계적인 공간 구성
외암마을의 건물들은 크게 두 가지 기준에 의해 배치되었다. 하나는 마을 가운데를 지나가는 안길을 활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을 동남쪽에 있는 개천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을 안길은 마을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중심축으로, 개천은 마을 전체의 범위를 한정하는 기준으로 활용했다.
안길은 마을 공간을 이루는 공동 시설들과 주요 건물들을 연결하는 도로이며, 마을 입구에서 시작해 마을 후면의 주거지 경계까지 이어진다. 반면 샛길은 안길이 형성된 후 뻗어 나온 길로, 점차 조성되는 대지에 접근하는 데 이용되는 골목이다. 샛길은 남부 지방에서는 고샅, 제주도에서는 올레라고 불린다. 안길을 중심으로 좌우로는 주로 주택들이 들어서고 개천 밖으로는 장승, 솟대, 상엿집처럼 사람들이 상주하지 않는 공동 시설들과 농경지가 자리 잡았다. 그러므로 주거 영역은 입구의 다리가 출발점이고 후면, 즉 동남쪽은 마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물길의 출발점이자 마을 영역의 한계점이다. 즉 물길을 벗어난 영역은 설화산의 화기가 미치므로 그 화를 피할 수 있는 수로의 출발점까지가 마을의 범위다.
다리를 건너면 동서 방향으로 주거지의 중앙을 관통하는 안길이 나타난다.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커다란 느티나무다. 높이 21미터, 둘레 3미터에 나이는 550세라고 하니 예안 이씨가 정착하기 이전부터 마을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를 중요시하는 것은 느티나무 앞에 단을 놓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현재에도 매년 음력 정월 14일 장승제를 지낸 후 느티나무제를 지낸다. 멀리서도 눈에 띄어 그 지역에서 방향의 기준이 되는 것을 안정좌 또는 랜드마크라고 한다. 이곳의 느티나무는 마을 입구에 있기는 하지만 마을 자체와는 다소 떨어져 있다. 주변 지세가 아늑한 영역을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집들이 완만한 경사지를 최대한 이용해 외암마을의 내부에서는 별다른 허전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주택들은 표고 50미터에서 175미터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평균 경사도는 25퍼센트다. 다른 전통 마을보다 다소 높지만 경사를 잘 이용해 집의 후면은 어느 정도 아늑하다.
외암마을은 위치상 겨울에 북서풍에 노출된다는 환경적 불리함이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런 악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좀더 나은 거주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했다. 불리한 자연 조건에 적응한 인문 경관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가옥의 평면 구조와 좌향이다. 또한 설화산과 이간 선생 묘소를 잇는 능선상에 마을의 우백호로서 비보 역할을 하는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 위치상 마을 북쪽에 있어 방풍림 역할도 한다. 외암마을처럼 불리한 입지 조건을 환경 친화적 요소로 극복했다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입지에 자리한 마을에서 얻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