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
‘이야기’가 가진 힘이란 꽤나 강력하다. 잘 짜여진 이야기는 실체나 논리를 넘어선 지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매혹시킨다. 소설이나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오디션 프로그램의 지원자나 선거에 임하는 정치인, 젊은 구직자 들이 저마다의 구구한 사연을 늘어놓는 이유는 분명하다. 나를 보아 달라고, 나를 이해해 달라고, 나를 받아들여 달라고. 문제는 도처에 넘쳐나는 ‘스토리텔링’ 때문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야기는 유효하지 않은 걸까? 천만에!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이야기가 그렇게 쉽게 시들어갈 리 없다. 사람들은 다만, 꾸미고 과장하는 이야기들에 진저리를 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진심도 깊이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호적인 무관심』은 아동문학 평론가이자 번역가, 출판사 ‘바람의아이들’ 대표인 최윤정의 산문집으로, 꾸며놓은 이야기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진짜’ 일상과 느슨한 듯하면서도 유연한 시야로 포착한 다양한 생각들이 담겨 있다. 일상에서 느끼는 단상과 짤막한 삽화들은 거대한 메시지를 위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서사로는 잘 파악하기 힘든 진짜 삶을 드러내준다. 과장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것이다. 저자는 위험천만하게 차도를 건너는 떠돌이 개나 지하철에서 육탄전을 벌이는 노인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조그만 아이 등등 우연히 스쳐가는 짧은 만남도 놓치지 않고, 양파를 다듬거나 고구마와 감자를 삶는 동안에도 인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때의 인생은 높은 곳에서 관조하는 풍경이 아니라 직접 부대끼고 좌충우돌하는 ‘생활’에 가깝다. 저자는 생활인으로서 빵을 사고 산길을 걷고 병원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나란히 서 있는 슈퍼 두 곳 때문에 공연히 신경을 쓰거나 비오는 날 산책을 하러 나섰다가 엉뚱한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요컨대 21세기 대도시 서울에서 누릴 법한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이다.
하지만 별볼일 없는 사물이나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이라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안에 각각의 우주를 담고 있기 마련이다. 『우호적인 무관심』에서 저자는 짧은 일별에 그칠 수 있는 수많은 에피소드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면서 그때그때 다른 무게와 깊이의 생각을 드러내준다. 때로는 가볍고 경쾌하게, 때로는 한없이 진지하고 절실하게! 순박하고 정직한 과일장수 덕분에 더위가 좀 가셨다고 느끼거나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은 일은 누구나 수없이 되풀이해서 겪는 일이다. 하지만 그 순간 번개처럼 지나가는 갖가지 인상과 상념을 포착해내는 일은 또다른 차원일 터. 우연히 듣게 된 비극적 기사에 분노하고, 운전하다 목격한 광화문 스케이트장에서 ‘21세기 우민정책’을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일상을 대하는 한결같이 진지하고 우직한 태도다.
누군가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우호적인 무관심》은 100편도 넘는 글을 싣고 있는 만큼 그 안에는 저자가 경험한 다양한 시간과 공간이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렸을 적 집에서 학교까지 이어지던 골목길이나 프랑스 유학 시절 수업을 듣던 강의실,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며 바꿔 들었던 방이나 사무실 등등 각기 다른 시공간에 얽힌 이야기는 특별한 순서나 구조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저자가 어떤 이력과 경로를 통해 현재에 이르렀는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훈장을 타서 축하 인사를 많이 듣는다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식이다(저자는 201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 공로훈장을 받았다). 애초에 이 책은 누군가의 전기를 읽듯 한 사람의 인생을 파악하기 위해 들춰보는 책이 아닌 것이다. 만들어진 스토리가 아닌 탓에 커다란 서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저자 자신의 개인적 성취나 전문성을 자랑하는 책도 아니어서 뚜렷한 메시지가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산문집은 오랫동안 문학을 업으로 삼아온 한 예민한 여성이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기억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기억이란 원래 순서도 구조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 책에서 마주치는 것은 특정한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다. 누구나 어느 한순간 익숙한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거나 길을 걷다 마주친 타인의 표정에 대해 곱씹고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다가 상심할 때가 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많은 사물과 사람, 시간과 공간, 관계와 인연, 인상과 생각 들을 그저 스쳐 보낼 뿐, 무엇 하나 오래도록 지켜보지 못한다. 저자는 우리를 대신하여 고즈넉한 시선으로 다양한 시공간을 거닐면서 순간을 포착하고 그 이면에 담긴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색한다. 삶에서 느끼는 바는 제각각일지라도 삶의 가치란 누구에게나 동등한 것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는 이 책에 담긴 진지한 사유와 생활의 실감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책의 제목이 된 짧은 글에서 작가는 “열정적인 관심이 아니라, 우호적인 무관심이다. 차이를 존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있다면 거기에 우리가 답해야 할 묵직한 질문이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호적인 무관심으로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볼 일이다. 두툼하게 제본된 책갈피 곳곳에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이 수록되어 있어 읽는 재미와 함께 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