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시대: 인권에 관한 깊이 있고 풍성한 생각할 거리를 모두 다루다
오늘날 인권은 가장 짧은 시간 동안에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가치가 되었다.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권은 일부 서방 국가의 소수 시민만이 누렸던 특권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저 먼 아시아의 변방 티베트의 인민들도 중국의 압제에 저항할 수 있는 영감과 힘을 인권에서부터 얻고 있다. 정치적 독재에 맞선 지속적인 투쟁 끝에 마침내 민주주의를 일궈낸 우리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의 자유화와 민주화 과정은 물론, 지금 진행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정에서도 인권 복음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지역적인 편차에도 불구하고 인권은 어떤 지역도, 국가도, 종교도, 문화도 행동을 취함에 있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지고의 가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제 인권은 인종, 문화, 종교, 계급, 국가, 지역의 차이를 초월하여 지배 가치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지구적 수준에서 보면 인권은 아직 자명하거나 확고부동한 공존 원리가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인권은 긴 시간과 광범위한 문화권에 걸친 수많은 투쟁을 통해 점진적으로 그리고 누적적으로 확립되어왔다. 그래서 인권은 아직도 많은 철학적·이론적·실천적 난제를 지니고 있다. 명실상부한 인권의 시대는 이런 산적한 문제들이 상당 부분 해결될 때에야 실현될 것이다.
이 책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다수 시민의 이해가 인권 시대의 도래를 앞당기는 동력이 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소산이다. 이 책은 한국정치사상학회의 회원(16명의 학자)이 함께 연구한 결과물이다. ‘인권’이라는 대주제를 놓고 각자의 전문 분야별로 연구 테마를 나누어 연구하였으며, 그것을 함께 생각하고 토론한 결과물을 엮은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다 고찰할 수 없는 인권의 다양한 측면을 검토할 수 있었고, 인권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거의 모두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편의 글을 꼼꼼히 읽어보면 인권에 관한 유익하고 풍성한 생각할 거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어두운 인권의 현실
인권 복음이 범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역에서 인권의 실상은 여전히 암울하다. 오늘날 인권 분야만큼 이론과 실제의 간극이 크게 벌어진 분야도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 곳곳에서 대량 학살과 테러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고문과 정치범 박해와 같은 인권침해 사례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국처럼 고도의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국가들에서도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실현은 아직도 요원한 과제로 남아 있다. 아프리카로 눈을 돌려보면, 종족들 사이에 빈번히 대량 살상이 자행되고 있으며, 질병과 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아사하거나 아사 직전에 처해 있다. 심지어 문명의 최전선을 달린다고 자부하는 서구 국가들에서도 인종차별적 관행과 경찰의 가혹 행위, 수감자들에 대한 학대, 불법 입국자들에 대한 잔혹한 색출과 추방 행위 등이 빈번히 자행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사회에서도 아동 학대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착취, 경찰에 의한 불심검문, 피의자에 대한 가혹 행위 등 크고 작은 인권침해 사례들을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현대 인권 담론의 쟁점과 전망
인권 체계가 제1명제로부터 수미일관한 연역적 논리를 통해 도출되었다면 인권 담론에는 긴장이나 모순이 내재하지 않겠지만, 실제로 인권은 복잡한 역사·정치적 과정을 통해 점진적이고 누적적으로 인정·채택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의 상이한 역사 인식과 필요를 반영하고 있는 까닭에 구조적인 긴장이나 모순을 내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지구화 추세 및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 등이 결부되면 인권을 둘러싼 담론 형성은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데, 인권 담론이 인권의 실제를 개선하는 데 무력한 한 가지 이유는 인권 담론이 체계적 정합성과 명료성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권 담론 내부의 긴장과 모순을 들어 인권의 한계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관적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인권 규범은 어느 정도 현실 질서를 틀 짓고 또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권 규범은 수많은 국가와 집단 및 개인에 의해 지지·준수되고 있으며 규범적 장악력을 넓혀가고 있다. 이 때문에 인권 담론의 내부적 긴장과 모순을 핑계로 그 규범적 타당성과 유용성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온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이기조차 하다.
이처럼 인권 담론이 지닌 최소한의 규범적 타당성과 현실적 유효성을 인정할 경우, 인권 담론에 내재하는 긴장과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먼저 총론으로 현대 인권 담론의 쟁점과 전망을 조망한 후, 이어 현대 주요 정치사상(자유주의, 공동체주의, 보수주의, 공화주의)의 인권 담론을 자세하게 규명하고, 인권 담론의 근대 정치사상적 기원을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프, 로크, 루소, 페인, 맑스 등의 사상을 통해 살펴본다. 4부에서는 올랭프 드 구주, 메리 월스톤크라프트, 수잔 앤소니와 엘리자베스 캐디스탠톤, 존 스튜어트 밀, 콜론타이 등을 중심으로 페미니스트 인권 담론을, 5부에서는 동아시아 인권 담론의 기원과 자원을 다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 지구화 시대의 인권 담론의 과제와 전망을 조명한다.
이 책에서 정리하는 현대 인권 담론의 쟁점들은 다음과 같다.
- 인권 개념은 유용하고 바람직한가?
- 왜 자연권 대신 인권인가?
- 인권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인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인가?
- 인권은 어떻게 정당화되어왔는가?
- 인권의 보편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인권 체계 내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지구화 시대에 인권은 누가 소유하며 누가 이행의 의무를 지는가?
- 인권 규범의 보편성을 어떻게 확립할 수 있는가?